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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관료의 역주행, 민심이 안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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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논설주간

관객 1000만 명을 돌파한 영화 ‘변호인’ 신드롬을 바라보는 여권 인사들의 심기가 편치 않다. 6월 지방선거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걱정하는 이도 있다. 실제와 다른 부분도 있지만 관객들은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내던지는 인간 노무현에 대한 오마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변호인’ 관객동원 성공의 일등공신은 역설적이게도 박근혜 정부다. 한 현직 장관이 털어놓은 얘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코레일 최연혜 사장이 철도파업 첫날(12월 9일) 가담자 4356명을 직위해제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국민에게 불편을 준 노조가 직장에서 내몰린 피해자 집단이 돼버렸다. 프레임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와 ‘변호인’ 돌풍의 시발점이었다.” 사실 노조원 8500여 명이 직위해제됐지만 지금까지 징계절차가 진행 중인 400여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업무에 복귀한 상태다. 단지 파업기간 동안의 수당을 못 받았을 뿐이다. 부풀려진 위협의 후폭풍은 이렇게 발생했다.

 현직 장관의 분석은 정확했다. 고대생 주현우씨의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나온 것은 파업 나흘째인 12월 12일이었다. 무더기 직위해제를 정조준했다. 곧바로 전국의 대학가와 집회 현장, 포털에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와 피켓, 댓글이 넘쳐났다. 영화 ‘변호인’은 엿새 뒤인 18일 개봉했다. 시청앞 광장을 가득 메운 철도파업 지지 집회에 넥타이 부대가 몰린 것은 다음 날인 19일이었다. 그는 “지금은 직위해제가 지나쳤다는 반성론이 있지만 노조 지도부가 피신한 민주당과 조계사에도 공권력을 투입하자는 의견을 낸 장관도 있었다”라며 어이없어 했다.

다행히 박 대통령은 민심의 흐름을 잘 파악해 대처하고 있다. 신용카드사 개인정보 유출 사건과 관련해 국민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표현한 현오석 경제부총리에게 “국민에게 상처 주는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심기만 살피다 국민을 함부로 대하는 분위기가 민심을 거스르는 역주행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영화 ‘변호인’이 1000만 관객을 돌파하고,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와 프랑스의 르몽드가 한국의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을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지만 대통령 지지율은 50%대를 유지하고 있다.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대통령은 잠재성장률 4%, 국민소득 4만 달러 이상, 고용률 70% 달성을 핵심으로 하는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이라는 구체적인 청사진을 내놨다. 규제개혁 장관회의도 직접 주재하기로 했다. 500조원이 넘는 부채를 끌어안고 있는 공기업 개혁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런 모습에 대해 국민은 진정성이 있다고 평가한 것이다.

 대통령과 정부가 솔선수범하고 있는 것도 좋은 신호다. 올해 공무원 연봉이 1.7% 인상됐지만 대통령을 포함한 3급 이상 공무원들은 인상분을 반납하기로 했다. 적게 내고 많이 받아가는 공무원연금도 국민의 입장에서 제대로 손보기로 했다. 세금으로 메꿔야 할 공무원연금·군인연금 충당금은 342조원에 달한다. 그런데도 연봉인상분 반납과 공무원연금 수술이 공기업 개혁과 고용률 70% 달성을 위한 노·사·정 대타협을 앞둔 선제적 조치라는 메시지는 국민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청와대와 안전행정부·기획재정부의 누구도 챙기지 않았던 탓이다.

공기업 노조들은 “정부가 정책실패를 공공기관에 떠넘기고 있다”며 연대투쟁을 선언했다. 부실·방만 공기업에 대한 개혁을 ‘약자에 대한 부당한 탄압’의 프레임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다. 철도파업에서 드러난 장관들의 아마추어리즘으로 과연 공기업 개혁의 프레임 싸움에서 우위에 설 수 있을까.

 어쨌든 공기업 개혁으로 부채를 줄여 재정 건전성 확보의 전기를 마련하고, 규제를 풀어 잠재성장률을 4%로 끌어올리고, 노·사·정 대타협으로 고용률을 70%로 높이고, 수차례 실패했던 공무원연금 개혁에 성공한다면 역사적인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문제는 팀워크와 집중력이다. 지금 정부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대통령, 집중력이 부족한 청와대, 일의 우선순위도 모르는 내각으로 굴러가고 있다. 이런 상태로는 곤란하다.

 정부는 거대한 톱니바퀴다. 정합성(整合性)을 유지할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큰 바퀴와 작은 바퀴가 제자리를 잡고 정확하게 맞물려야 힘의 손실이 최소화된다. 급하다고 혼자 돌아가면 나머지는 겉돌 수밖에 없다. 공학을 전공한 대통령은 잘 아는 물리학의 원리다. 과감하게 권한을 나눠주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 남은 4년의 임기에 비해 과제가 너무도 많다. 대통령이 어떤 리더십으로 시간과 사람을 다룰지 주목된다.

이하경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