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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보고서 대통령, 앵무새 장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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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논설주간

박근혜 대통령의 집중력은 살아 있었다. 취임 후 10개월 만의 첫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은 두 개의 굵은 점을 찍었다. 하나는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다른 하나는 한반도 통일기반 구축이었다. 국민소득 4만 달러, 고용률 70%, 잠재성장률 4%라는 구체적 목표를 제시한 3개년 계획은 창조경제의 모호성을 보기 좋게 날려버렸다. 내수를 살리기 위해 규제총량제를 도입하고 규제개혁 장관회의를 만들어 직접 주재한다고 했다. 구체적인 목표에 몸을 던져 승부를 거는 박근혜 스타일이 복원됐다. 이산가족 상봉을 앞세운 한반도 통일기반 구축도 기로에 선 남북관계를 전향적으로 이끌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경제혁신 계획의 기한을 3년으로 잡은 것이 인상적이다. 남은 임기는 4년이지만 마지막 1년은 국정운영 동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냉철함은 만만치 않은 도전의 과정에서 좋은 무기가 될 것이다.

 문제는 혼자 뛰면 안 된다는 점이다. 참모에게 권한을 나눠주고 소용돌이치는 민심을 경청해 원칙은 지키되 유연하고 현실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해야 한다. 대통령은 “보고서 보는 시간이 제일 많다”고 했다. 지금은 힘겨운 삶의 무게에 지쳐 안녕하지 못한 국민을 다독이는 데 주력해야 할 시점이다.

 철도노조 파업 수습 과정을 돌이켜 보자. 얼핏 보면 확고한 원칙을 앞세운 청와대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런데 내각의 주도적 역할은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은 “장관들이 철도파업을 남의 일 보듯 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안전행정부는 철도노조 지도부를 검거한다며 민주노총 사무실에 경찰을 진입시켰지만 검거에 실패했고, 노동계 전체와의 대립구도를 만들고 말았다. 노사관계를 책임지는 고용노동부와의 사전협의는 없었다. 무엇보다 한겨울 시청앞 광장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은 ‘철도민영화’보다는 팍팍한 삶과 정부의 불통에 분노했다는 사실을 정부만 알지 못했다. 모두가 청와대의 입만 바라본 결과였다.

 이제부터라도 대통령은 권한을 과감하게 위임해야 한다. 어느 장관은 “국무회의 보고는 간결하게 하고, 자랑을 하지 말라는 식의 분위기가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장관이 대통령의 발언을 받아 적기만 하는 초등학교 교실 분위기야말로 창조경제의 적이 아닐까.

 이명박(MB)정부의 임채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들려준 국무회의의 한 장면. MB가 질문하자 임 장관은 “대통령님, 그건 제가 더 잘 아니 맡겨주시지요”라고 했다. 그러자 MB는 “그래, 당신이 잘 알아서 해”라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이 정부의 소통능력이 MB 때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며칠 전 ‘의료민영화’ 반대를 명분으로 총파업을 예고한 의사협회를 주무장관으로서는 12년 만에 방문한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과 통화했다. 그는 “의사들의 진짜 관심사는 의료수가 인상이라는 속사정을 알게 됐고, 노력하겠다고 했더니 반응이 좋더라”고 했다. 이렇게 현장에는 정답이 숨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세포의 생성과 사멸을 동시에 겪고 있다. 그러나 유기체로서의 통일성을 이루면서 생명현상을 지속한다. 삶과 죽음이 화해하고 공존한다. 일종의 비적대적 모순관계에 있는 것이다. 대통령과 야당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은 문화 융성을 주창했는데 문화의 라틴어 어원은 ‘경작하다(cultra)’다. 경작 대상인 대지는 신성한 존재지만 부패한 동식물의 사체를 포함한 흙이 있어야 비로소 생명을 품을 수 있다. 대통령과 야당은 이를테면 어떤 허물도 받아들이는 대지인 셈이다. 따라서 상대의 주장을 거부할 때도 상처를 주지 말아야 공존과 상생의 미학이 만개한다. 야당이 응답을 원했던 특검 수용, 불통 논란, 사회적대타협위원회에 대해서 대통령이 차갑게 거부한 것은 안타깝다.

 어제 대통령은 “1초가 아깝다”고 했다. 할 일은 많고, 시간은 부족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정보사회의 다양성과 복잡성, 빠른 변화에 관료시스템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관료시스템이 산업사회에 최적화된 탓인데, 이는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이걸 극복하려면 대통령이 권한을 과감히 위임해야 한다. 박재창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정부의 의사결정 중추를 보다 현장에 접근시켜야 한다”고 주문한다.

 대통령이 보고서에 파묻히고, 장관들이 대통령 말을 반복하는 앵무새여선 안 된다. 대통령이 야당 시절인 2004년 7월의 발언. “개발시대 우리나라 경제수준이 세계 최하위 몇 번째에서 허덕일 때의 리더십과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루고 냉전시대가 끝난 21세기 정보화시대의 리더십은 다르다. 정부가 다 이끌어가려고 하면 경제와 사회발전에 해가 된다.” 지금도 맞는 말이다.

이하경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