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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내홍 속의 칠전팔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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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야당의 「진산시대」는 내홍으로 멍들고 거듭된 수난으로 좌절의 수렁에 빠져갔다.
당수 진산에겐 수난이 굽이쳤다. 두 차례 당수직을 물러나야 했던 파동은 그에게 더 큰 흠집을 남겼고 끝내 그 흠을 지우지 못하고 갔다.
야당의 「진산시대」는 70년 현민 유진우 당수의 퇴진에서 막이 열렸다.
3선 개환 저지를 위해 해당→재창당의 모험까지 결행한 피로로 현민이 병석에 누운뒤 그는 동경의 병상을찾아 영예로운 퇴진을 설득해 그해 1월26일 전당대회에서 이재형·정일형씨를 표로 눌러 당권을 잡은 것이다.

<각고 1년에 복권 도전>
당수 진산에게 닥친 최대과제는 3선 개헌지지의 제2「라운드」대결이 되는 71년 선거의 야당 대통령후보 지명.
70년 봄 당시의 원내총무 김영삼 의원이 「지명전경쟁」을 발표함으로써 때 이르게 「40대기수론」의 회오리가 밀려왔다.
『대통령 후보는 않겠다고 내 스스로 나의 공민권을 제한하고싶지 않다』 『어느 특정세대만이 대통령후보로 나설 수 있다는 것은 구상유취한 생각이다.』
지명전에 대한 만수와 당의방향을 안개 속에 감추며 그는 동남아 각국 수뇌와도 면담하는 등 「사꾸라」오명을 씻기 위한 집요한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도 대세 앞에 굴복, 그해 9월 「40대 기수」선택의 단을 내리고 정권교체 전열에 앞장섰다.
그의 「이미지」도 이 과정에서 씻겨져 가는 듯 했다. 그러던 것이 국회의원선거에서 느닷없이 다시 지역구를 포기함으로써 세칭 「5·6전국구파동」을 자초하고 말았다.
5월6일 그가 전국구등록을 손수 마치고 돌아왔을 때 당수의 석연찮은 지역구포기에 항의하는 당원들로 6백평 들은 들끓고 있었다.
경호청년당원 호위아래 방에 들어가 앉았지만 『당수가 선거구를 말아먹었다』는 청년당원들의 울부짖음 속에서 상도동 진산 댁은 수라장이 됐다.
때를 같이해 김대중씨는 『이제 신민당은 유진산씨와 김대중중 한사람을 택해야할 고비에 이르렀다』고 선언하고 진산제명에 착수했다.
이리하여 터진 적전내난은 결국 1주만에 김홍일 당수권한 대항체제로 어정쩡한 마무리를 지었지만 잊혀져가려던 진산의 오명 「사꾸라」비판은 또 한번 뚜렷이 되살아나고 말았다.
선거가 끝나 「당내진상조사의」활동 끝에 김대중씨의 공개사과를 받아내고 김대중씨의 당권도전을 김홍일씨를 내세워 꺾는 1년의 집요한 「진산다운 각고」끝에 그는 급기야 1년 후 당수복귀작업에 손을 뻗쳤다.

<한 당에 두 당수가 등장>
그러나 당도재도전은 예기한대로 김홍일 김대중 양일동씨 파가 뭉친 반진산계의 세찬 저항에 부딪쳤다.
그는 김대중 김영삼씨간의 상호견제 등 당내의 미묘한 역관계를 능란히 조타해 세력을 넓혀갔다.
완강한 저지투쟁과 정치운을 건 진산의 재도전이 맞부딪쳐 당은 뿌리째 요동했다.
이런 가운데 73년9월26일 진산은 자파만의 대회를 강행, 당수에 복귀하고 반진산계는 효창동대회를 열어 김홍일씨를 당수로 확인함으로써 한 당에 두 당수가 등장하고 정통성판가름을 젊은 법관에 맡기는 비극의 야당이 되고 말았다.
두 동강의 분쟁으로 당 기능이 마비된 가운데 맞은 것이 「10·17사태」.
국회는 해산되고 정당활동이 중지 당하자 그제서야 법정을 무대로 했던 신민당의 법통다툼도 철회됐다.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2·27국회의원선거를 위해 정당활동이 재개됐을 때는 진산은 아무런 장애없이 한사람만의 당수로 재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2·27선거에 나선 신민당후보자를 위해선 「정일형 과도체제」로 국민 앞에 진산체제를 잠시 눈가림해야할 상처투성이의 「진산 당수」였다.

<분당 몰고온 파동 여진>
마지막 보수정객 진산은 이렇듯 파란을 딛고 일어서 야당의 현역당수로 숨지고, 그래서 당장의 예우를 받으며 갔지만 그에게 씌워진 오명을 스스로 씻는 일을 해내지 못한 채 갔다.
책임이 누구에게 있건 윤보선·유진산간의 진흙탕싸움 「진산파동」은 야당전열에 아물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
민정·민주만이 결합해 이룩한 5·16후 최초의 통합야당민중당이 박순천 당수를 내고 윤보선씨가 당을 이탈, 신한당을 창당함으로써 곧바로 분열도 된 것.
여당수의 동 민중당이 전원생활로 돌아간 학자 현민을 대통령후보로 전면에 내세우고 그래서 열린 윤보선·전진우·백낙준·이범석 4자 회담을 거쳐 선거직전 야당전열을 엉성하게 통합 정비해야 했던 통합야당 신민당창당이 모두 진산파동의 여파였다.
당수직에 공백은 있었지만 70년이래 야당은 「진산시대」였다.
총선을 앞둔 적전내란에도 71년 선거에서 국민은 야당을 외면하지 않아 야당사상 처음으로 의석의 절반 선에 다가서는 의석을 얻었다.
새로운 의정질서에 기대를 걸게 한 「8대 국회」였다.
그러나 법관과 검찰이 대립한 「사법파동」에도 무위의 국회였다.
여당내 갈등이 내무장관불신임안을 가결하게 했고 이로 인해 여당간부 2명이 정계를 떠나는 「10·2파동」에도 야당은 침묵했다.
잇단 보위법 파동과 비상사태선언-.
8대 국회에 닥친 이 벅찬 시련에도 신민당은 진산과 대중의 대결 속에 시달려야했던 것은「5·6전국구파동」의 여진이었다.
당수 진산은 2·27선거에 임하는 명분으로 『현실을 산고와 같은 아픔을 참아가며 긍정 그 바탕 위에서 점진적 개혁을 추구해 나가겠다』는 「긍정 속의 부정론」을 내걸었다.

<평가는 후세의 사가에>
『정치가 아무리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아니 현실이기 때문에 집권자가 민주정치의 「룰」을 깨도 상대야당이 그 「룰」속에서만 안존할 수는 없잖으냐』는 비판에도 그는 『야당도 합법정당이며 나는 혁명가는 아니다』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던 그도 올해 연두사에서 『신민당의원들은 어쩌면 국회를 박차고 나와야할지 모르니 새로운 각오로 이해를 맞이해야겠다』면서 「행동의 해」를 당의 표어로 내걸었다.
1·8대통령 긴급조치가 선포된 직후 병상의 몸이 되면서 그는 해야할 일 때문에 조바심했다. 『국회가 열리면 내가 앞장서 싸울 작정이야』 『나라의 사정이 이렇게 막바지상황으로 몰려가는데 내가 이렇게 누워있어서야…』 .
그러던 어느날엔 『이 나라를 어떻게 하나』며 이민우 총무를 붙들고 흐느끼기도 한 병상의 진산이었다.
그는 마무리짓고 가야할 일 때문에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았을지도 모른다. 한이 있었다면 무엇이었을까.
그도 스스로의 마지막을 느꼈음인지 공사 간부후보생이된 장손 지흥군 등 손자들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을 남겼다.
『강하면 부러지기 쉽고 비분강개해 죽기는 쉬워도 조용히 의로운 일에 나가기는 어려운 법이야』
『내가 죽은 다음 내 무덤에 눈을 흘기고 침뱉는 것은 좋지만 너희들이 한동안 의기소침해서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군. 그러나 사내란 1백년은 내다보면서 살아야지….』
손자에 힘없는 손을 잡힌 채 남긴 그의 유언이기도하다.
진산이 평소 자주 한 말이 있다.
『그 진가를 먼 훗날 사가의 손에 맡긴다는 신념 없이는 정치는 말아야한다』는 것.
그에 대한 냉혹하고 공정한 평가는 그가 바랐던 대로 아직 그때가 아닌 것으로 해두기로 하자. <허준기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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