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위 김일성 열전-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8)-제자=김홍일|김성주 아닌 두 김일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1930년(김성주 나이 18세 때)만주의 한인사회가 온통 공산당의 테러와 폭동으로 시끄러울 때에 김일성이란 이름을 가진 두 청년이 있어서 각기 별개의 지역에서 공산테러에 앞장선 일이 있다. 한 김일성은 이해 초에 죽었고 또 한 사람의 김일성은 이 해 여름에 소련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해 겨울에 김성주도 같은 김일성이란 별명을 갖게된 사연이 있다. 그리고 이 김일성(김성주)도 위 두 김일성과는 다른 장소이지만 역시 공산테러의 앞장에 서기는 마찬가지였다.
1930년 5·30간도폭동사건과 그 해에 있었던 중국본토에 있어서의 중공군에 의한 장사함락 등의 영향으로 더욱 공산주의로 기울게된 재만한인사회는 공산주의자들의 테러로 뼈아픈 시련을 겪게 되는데 그전부터도 테러행위를 혁명운동으로 아는 풍조는 재만한인 공산주의운동의 시초부터의 한 특색이었다.

<테러가 혁명운동이란 풍조>
김성주의 아버지 김형직도 그래서 죽었지만 이와같은 테러로 1929년께부터는 더욱 노골화해서『보수적 농민을 학살하라』 『민족주의 단체를 타도하라』는 등 구호가 공공연히 외쳐지게 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의 테러로 인한 가장 큰 희생은 김좌진 장군의 죽음이다.
김좌진 장군은 참의·신민·정의 3부의 통합으로 국민부가 발족은 했으나 그 국민부의 관할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인 북만의 원 신민부의 기반을 관할하기 위해 1929년7월에 한족총연합이란 자치조직을 만들어놓고 그 주석으로 있었다. 본부를 중동선 일대를 관할할 수 있는 영안현 산시역전에 두었으며 한인들의 생업을 돕고 자치를 도모할 것에 힘을 쏟으면서 김 장군 자신도 그 근처에 정미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1929년12월25일(음력), 마침 고장난 정미소의 기계를 손보고있는 김 장군을 고려공산청년회원인 김일성이란 청년이 뒤에서 권총으로 쏘아 무장항일투쟁의 거성은 철없는 공산당의 테러 때문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김 장군은 중국군과 함께 일군을 공격할 계획이었는데 공산당측은 자기네와의 협력을 김 장군이 거절한데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범석 장군의 생전의 증언에 의하면 김좌진 장군이 암살되자 격분한 그 부하들은 김일성을 붙잡아내서 때려죽이고 말았다고 한다. 만주의 한 한인공산주의 그룹의 기관지였던 「적기」1930년 3월호에 「김일성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사가 있는데 이것이 아마 김 장군을 암살하고 맞아죽은 그자에 관한 일이었을 것이다.
공산당들은 항일투쟁의 맹장 김좌진장군을 암살하고 나서도 조금도 뉘우침 없이 그것을 마치 무슨 혁명적 거사나 된다는 듯이 여기고 암살자의 죽음을 애도까지 하고있으니 그들의 생리는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다. 공산당들은 초기에 있어서는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의 동시수행이란 목표를 내세우고 있었으나 1930년에 가까이 오면 올수록 조국광복의 대업은 제쳐놓고 오히려 독립부터 하고 보자는 민족주의자들과 그 단체부터 때려부수는 테러에 혈안이 되었으니 가위 민족반역의 무리들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5·30폭동 행동대장 김일성>
이와같은 시대적·사회적 환경 속에서 성장했고 또 그 속에서 점점 공산주의자가 되어간 김성주의 의식구조나 행동양식 역시 알만도 하다. 김성주도 의견만 맞지 않으면 반동으로 몰아 그 사람을 때려죽이는 것쯤은 밥먹듯 해치우는 사람인 것이다.
김좌진 장군에게는 나혜국이란 부인이 있었다. 나 여사는 함북회령 태생. 한번 시집갔다가 사별하고 북간도를 거쳐 북만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김좌진 장군을 만났다. 나 여사(74세)는 남편 김좌진 장군을 잃고 만주를 떠나 서울 북아현동에서 지금 살고 있다.
김좌진 장군은 죽었고 그를 죽인 김일성도 죽었다.
그러나 이 무렵에 또 하나의 김일성이란 사나이가 있었으니 그는 5·30간도폭동사건 때 용정에서 파괴활동에 앞장섰던 자다. 간도폭동에 있어서 주동역할을 한 것은 주현갑, 이동선, 배동건, 그리고 부인당원으로는 김경애의 2명 등등인데 용정 시내에서의 첫날밤 행동대장은 양재풍과 김일성이었다.
5월30일 밤9시쯤부터 많은 당원들이 시내 동산의 「대륙고무」회사부근에 모이기 시작, 그 수가 수십명에 이르자 전원을 2대로 나누어 1대 십수명은 양재풍이 지휘하여 용정촌 정거장 서북쭉에 있는 용정촌 전등공사를, 1대 약20명은 김일성이 지휘하여 이 정거장 안의 천도철도기관차고를 파괴, 방화하기로 했다.
대원들은 모두 도끼·몽둥이·성냥·알콜을 넣은 병 등을 준비하여 각기 출발했는데 김일성이 지휘하는 1대는 정거장 근처에 도착했으나 사람들의 내왕이 많아 목적을 달성 못했고, 양재풍이 인솔하는 1대는 전등공사의 파괴에 성공함으로써 전 시내를 암흑가로 만들었다.
김일성은 김춘일이란 자와 한패가 되어 용정 인근을 돌아다니며 혁명을 빙자하여 공갈·협박·강탈·살상을 일삼기도 했는데 폭동사건의 관련자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자 붙잡혀서 용정의 일제간도영사관 유치장에 갇히고 말았다.

<폭동 때 검거됐다가 탈출>
그러나 운좋게도 그는 서울로 압송되기 전에 유치장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후 그는 소련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그는 적군사관학교까지 졸업하고 후에 만주로 파견되어 유격대장이 됐다(독자는 이 김일성을 꼭 기억해 두기 바란다. 이 사람은 이 「진위 김일성 열전」중의 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간도폭동 당시 김일성은 대성중학교의 한 학생이었다. 당시 용정에는 동흥·대성의 두 사립중학교가 있었는데 한인들의 학교였으며 이 두개의 학교가 간도에 있어서 한인공산주의 운동의 온상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김일성과 같이 대성중학생으로서 간도폭동사건에 관련되어 재판을 받은 자로는 임해갑(4학년생·당시22세·대성중학조직책·별명 극종) 최학봉(3학년생·18세) 이복동(1학년생·19세·별명 규림·광) 등이 있다.
당시 학생의 신분으로 공산주의혁명을 한답시고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파괴·협박·강탈·살상을 일삼는 자들이 있는가하면 또 더러는 한·만 국경지대에 나타나 공산주의 선전을 한답시고 작당, 횡행하는 자들도 있었는데 김춘일이란 자가 그런 경우의 하나다.
1930년 여름께의 일이었다. 하루는 배에 총상을 입은 청년 하나가 혜산진 도립병원에 치료받으러 나타났었다. 이름은 김춘일. 나이는21, 22세 가량인데 실수로 자기가 갖고있던 모젤 권총으로 자기 배를 쏘았다는 것이다. 장백현 십구도구에서 배를 쏘았는데 병원을 찾아 혜산진으로 기어 나왔던 참이었다.

<대성중학 다니며 작당행패>
그는 함남 혜산진의 봉안에 출몰하는 공산당 패거리의 일원이었고 그 책임자는 김철이란 것이 알려져 혜산진 경찰서에서는 김춘일의 안내로 김철의 아지트를 습격해 저항하는 김철은 사살해버렸고 세 사람을 체포했다. 김춘일은 용정의 대성중학생이었다. 간도에서 잡혔다가 유치장을 탈출, 도주한 김일성은 그의 동기생인데 행방은 모르고 있었다.
김춘일은 그후 양민이 되어 결혼도 해 만주의 안도에서 잘살고 있었다. 간도폭동사건의 김일성은 유치장을 탈출한 후 국내로 잠입한 것이 아니라 소·만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갔던 것이며 이 사실은 후에 일제의 간도 총영사관에서도 확인됐던 일이다.

<고침>=전회⑦의 사진설명 중 용정거주 한인 「1천여명」은 「2만명」의 잘못이었으므로 바로 잡습니다.

<차례>
서장 5인의 김일성
제1장 김성주의 소년시절
⑥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
⑦중공당서 외면된 이종락 일당
⑧김성주 아닌 두 김일성
⑨김성주의 별명도 김일성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