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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대립은 아베노믹스에 순풍 … 우리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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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호 23면

새해 벽두에 주식시장이 서리를 맞았다. 일본 엔화가 저공 비행하면서 한국의 주요 기업, 나아가 한국 경제의 수익과 성장 전망을 날려버렸다. 세계 유수의 금융투자회사에는 ‘글로벌 전략가’라는 직책이 있다. 1991년 주식시장을 10% 개방한 이후 해마다 연말이면 한국개발연구원(KDI)으로 이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노련한 분석가들로 투자자금을 어느 지역, 어떤 산업 또는 상품에 배정할 것인가에 대한 윤곽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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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아마 엔화가 급강하하는 차트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비중을 줄이자고 했을 것이다. 그래프에서 보듯 2008년 하반기 글로벌 금융위기가 본격화되면서 엔은 원화는 물론 달러에 대해서도 고공 행진을 지속했다. 한국 경제가 이번 위기를 비교적 무난하게 넘긴 것도 원화의 평가절하에 힘입은 바 적지 않다. 반면 일본은 세계경제 침체에 따른 수출 수요 감소와 엔고라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그러다가 아베 신조가 총리로 재취임한 2012년 말부터 엔화는 가파르게 절하됐다. 달러가 78엔에서 105엔으로 올라 일본 경제의 회복을 견인한 것이다. 지난해 일본 주가는 평균 75%, 도요타는 두 배, 소프트뱅크는 세 배로 뛰었다. 아베 총리의 지지도가 높은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2020년 도쿄 올림픽까지 유치했다.

많은 사람이 아베노믹스는 허상이라고 생각했다. 몰상식한 금융완화로 물가와 금리가 상승하면 국내총생산(GDP)의 230%에 달하는 국채 이자 부담으로 재정이 파탄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경제이론에 의하면 맞는 지적이다. 아베노믹스는 물가에 대한 일본인의 기대를 바꾸어서 오늘 살 것을 내일로 미룰 필요가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그래서 기업인이 만들면 팔린다는 희망을 품고 투자에 나서게 하려는 것이다). 진흙 속으로 빠져들고 있던 일본 경제의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으니 일단 시작은 성공이다. 장기적으로는 지금의 성공 요인이 훗날 위기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 여부의 전망이 아니라 일본이 아베노믹스를 거침없이 밀어붙인다는 사실이다.

아베노믹스의 핵심은 엔 절하인데 원한다고 절하가 되는 것인가. 환율이란 상대가 있는 가격이고, 수많은 시장참가자가 여러 경제 변수를 감안해 사자, 팔자에 나섬으로써 움직이는 것인데? 1985년 9월 플라자 합의 당시에는 엔화가 삽시간에 갑절로 급등했다. 그때는 주요 국가 간 합의로 가능했지만 국제금융이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화된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아베노믹스를 한때 도외시했던 까닭은 주요 통화국, 특히 미국이 대폭의 엔 절하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엔이 큰폭으로 절하되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상당 기간 약세 기조를 지속할 것이라고 글로벌 전략가들은 보는 것 같다. 그들이 그렇게 보는 근거는? 경제변수보다 국제정세에 방점을 두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골퍼들은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한라산 쪽이 높다고 생각하고 퍼팅하라는 조언을 받는다. 지정학적으로 지금의 한라산, 즉 전체 지형을 좌지우지하는 중심 요소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다. 이제 중국은 도광양회(韜光養晦)라는 어려운 사자성어 시대를 끝내고, 간단명료하게 대국굴기(大國堀起) 하려 한다.

지난 세기에 독일 등 자본주의 후발국은 자원과 시장을 얻기 위해 영국 등 선발 자본주의 국가와 세계대전을 벌였다. 중국이 경제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석유 등 자원을 얻기 위해 전 세계로 뛰어다니는 동안 미국은 이를 극력 억제했다. 하지만 글로벌 위기 이후 서방 선진국이 주춤하는 동안 세계의 유전·탄광 등이 무더기로 중국에 넘어갔다. 미국이 회심의 카드로 여기고 있는 셰일가스도 중국 매장량이 더 많다.

리먼브러더스 파산 직후 2009년 초 열린 다보스포럼에서 한 중국인 참석자가 말했다. “국공내전 당시 1949년에는 사회주의가 중국을 구했고, 덩샤오핑이 개혁하던 79년에는 자본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으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89년에는 중국만이 사회주의를 구할 수 있었고, 이제 글로벌 위기에 처해 중국이 자본주의를 구하게 될 것이다.” 이 농담이 진담이 되려 하자 미국이 방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실제 중국은 G2에 걸맞은 발언권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런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미국의 편에 확고히 선 나라가 일본이다. 청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난징대학살, 그리고 최근의 영해 분쟁 등 두 나라는 한편이 되지 못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아베노믹스의 첫 단추인 통화증발은 미국이 앞장서서 시범을 보인 정책이고 일본의 우경화, 즉 재무장은 미국 무기 수입을 의미한다(94년 김일성 사망 시에는 미국 일극체제여서 김정일에 대한 견제가 강했지만 2011년에는 글로벌 위기로 북한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 김정은이 시간을 번 것처럼).

국제정세적으로 지금은 아베 총리에게 매우 유리한 타이밍이다. 글로벌 전략가들이 엔화의 약세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는 데는 그만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신사참배와 관련한 일본 비난 여론 등 다양한 견해가 표출되지만 정치는 물론 경제까지 아우르는 미·일의 기본 기조는 대 중국 공조체제로 보아야 한다.

소치 겨울올림픽에 세계 정상들이 불참할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시진핑은 참가를 통보했다. 미·일 공조에 대응하고자 중국은 러시아와 연대를 도모하는 게 아닐까. 다시금 냉전시대와 비슷한 진영논리가 세계를 지배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한국은?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미국의 반대편에 베팅하는 것은 좋은 베팅이 아니다”라고 한 말은 통상적 발언이라고 해명했지만 속내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금리 인하 여부가 다시금 논란이 되고 있는데 광풍이 몰아치는 동북아에 위치한 한국이 지금 택해야 하는 정책 방향은? 금리를 내린다 하더라도 경기진작 효과는 의문시되며 정작 다음에 필요할 때 인하의 여지가 없어지는 부작용이 크다는 주장이 있다. 동감이다. 이미 실질금리가 너무 낮은데 명목금리를 더 내리면 마이너스로 가게 된다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세계 주요국 모두 실질금리가 마이너스인데 우리만 플러스를 유지했다. 우리는 상식을 지켰는데 오히려 역주행한 결과를 가져왔다. 순식간에 빠져 나갈 수 있는 채권투자 자금이 몰려와 원화를 절상시킨 것이다.

금리를 인하하고 통화를 풀면 물가가 오른다는 명제에는 화폐의 유통 속도가 일정하다는 전제가 있었는데 지금은 유통 속도의 하락이 통화증가분을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있다. 그래서 통화를 봇물 터지듯 부었음에도 인플레보다 디플레가 당면한 위험으로 대두되고 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도 디플레를 경고하며 말했다. “인플레가 램프의 요정 ‘지니’라면 디플레는 파괴와 공포의 상징 ‘오거’다.” 금리를 내려 환율을 올린다면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미국 통화정책의 오래된 금언으로 ‘Leaning against wind’가 있다. 바람이 거세게 불 때 꼿꼿이 서 있으면 넘어지므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기댄다는 뜻이다(한때 적정 통화량에 대한 연구가 유행이었다. 지금은 시들해졌다. 그런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적정 환율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설령 안다 하더라도 그 환율을 견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다만 절하 압력이 있으면 조금씩 절하하면서 추이를 보는 것이 현명한 정책이다. 이때 경제변수뿐 아니라 미·중 관계를 주 능선으로 미·일 관계를 보조 능선으로 보고 지정학적 요소를 십분 감안해야 한다. 폭풍 속을 항해할 때는 선장이 항로와 관계없이 파고가 가장 높은 쪽으로 뱃머리를 돌리는 것처럼.



최범수 예일대 경제학 박사. 전 KDI 연구위원.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금융감독위원장 자문관으로 금융 구조조정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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