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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눈의 휘모리장단, 남도국악원이 뜨겁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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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극동연방대학교 한국학과 학생들이 국립남도국악원에서 사물놀이 영남풍물가락을 배우고 있다. 한겨울이지만 대부분이 반소매 차림이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 20일 오전 전남 진도군 임회면 국립남도국악원.

 사물(四物) 소리가 점점 빨라지다가 순간 휘몰아치더니 다시 느려지기를 반복한다. 절로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연수관 합주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젊은이들이 장구·북·꽹과리·징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한국인이 아니었다. 한 명만 빼고 열다섯 명 모두가 머리는 노란빛이 돌고 코는 높고 눈은 푸른빛이었다. 흥에 겨워 고갯짓하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국악기를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들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극동연방대학교 한국학과의 사물놀이예술단 ‘해동’ 단원들이다. 현지의 한국교육원이 소개해 준 인연으로 재작년과 지난해에 이어 세 번째로 남도국악원을 찾았다. 남도국악원 기악단 단원 김봉근(39)씨는 “기본은 갖춘 친구들이라서 영남풍물가락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에서 진도까지 오는 여정은 쉽지 않았다. 지난 16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22시간 타고 강원도 동해항으로 입국해 다시 버스를 9시간 타고 남쪽 끝 진도까지 왔다. 이튿날부터 사물놀이 영남풍물가락과 모듬북·장구춤을 공부하고 있다.

남도국악원 장악과 허산(54)씨는 “휴대전화 등에 녹음한 교육 내용을 밤 12시까지 틀어 놓고 복습하는 등 마치 우리 국악인들이 입산(入山) 공부하는 것처럼,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곤 공부에 열중하는 게 대견하다”고 말했다. 27일 귀국하기 전까지 11박12일 일정 중에 관광은 하루밖에 잡혀 있지 않았다.

 6월 졸업 예정인 사프루보바 에카테리나(22·여)는 “남도국악원에서 세 번째 연수를 받고 있는데 명인들에게 전문 지도를 받으니 실력이 금방 느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에카테리나는 아버지가 부산에 있는 선박 수리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아홉 살 때부터 한국을 자주 방문하면서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져 한국학과에 입학했고 이때부터 장구·북·꽹과리·징을 치고 두드렸다. 그는 “사물놀이는 장단이 단순하면서 강렬한 매력이 있어서 사람들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말했다.

 일행 중 유일하게 외모가 한국인 같은 칸 루슬란(26)은 고려인 3세. 대학원생인 그는 “지금 블라디보스토크는 최저 기온이 영하 30도까지 내려갈 만큼 엄청 춥다. 여기는 한겨울이라는데도 따뜻해 좋다”고 말했다. 러시아 학생들은 남녀 모두 실내는 물론 실외에서도 얇은 바지·레깅스와 반소매 셔츠 차림으로 생활하고 있다.

 1995년에 만들어진 사물놀이단 ‘해동’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려인 축제·잔치나 한국 관련 행사 때 단골로 출연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프로 아이스하키클럽이 홈 경기를 할 때마다 초청받아 응원 공연을 펼치기도 한다. 연수단을 이끌고 온 아쿠렌코 바딤(30·한국역사) 교수는 “한국학과 학생 200여 명 중 고려인 후손은 15%가량”이라고 말했다.

 남도국악원은 97년부터 해마다 입양아 및 해외동포 2·3·4세, 관련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체험사업 ‘한국을 가슴에 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왕복 교통비는 본인이 부담하고, 강습과 숙식은 남도국악원이 무료로 제공한다. 이 프로그램에 지난 2년간 참가했으며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한국 국악·무용 등을 가르치는 사할린 에트노스 예술학교 학생들은 다음 달 7일부터 러시아 소치에서 열리는 겨울올림픽에 초청받아 한국 음악을 연주할 예정이다.

진도=이해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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