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세월이 너무 빨라 허전하다는 50대 남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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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50대 중반 남성입니다. 다행히 사업이나 가정 모두 별 탈은 없지만 최근 세월이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것 같아 허전합니다. 2013년이 어제 같은데 벌써 2014년이라니요. 일년이 하루만에 지나간 느낌입니다. 나이 들면 시간이 더 빨리 간다는 말을 정말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게 단지 심리적인 건가요. 그리고 혹시 이 흐름을 좀 더디게 할 방법은 없을까요.

A 주신 사연에 저 역시 깊이 공감합니다. 바로 지난 주 만난 환자 같은데 진료기록을 보면 6개월 전이라 깜작 놀란 적도 있죠. 19세기 프랑스 철학자 폴 자네는 인생의 특정 시기를 얼마나 길게, 혹은 짧게 느끼느냐 하는 주관적 느낌은 그 사람의 나이와 반비례한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면 한 살짜리 아이가 1년을 1로 느낀다면 열 살짜리는 1년을 10분의 1, 70세는 70분의 1로 느낀다는 겁니다. 사연 주신 분이 55세라면 1년을 55분의 1로 느끼니 날짜로 환산하면 6.63일입니다. 1년 365일을 7일이 채 안되게 느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현상을 우리 뇌 안의 생체시계 리듬이 느려지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연령대별로 시계를 주지 않고 3분을 추정하라고 했더니 젊은층은 3분에 거의 근접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더 느리게 추정을 했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한 10분쯤 지나야 겨우 3분 정도로 생각한 거죠. 달리 말하면 벌써 10분이나 흘렀단 말이야, 입니다. 벌써 12월 31일이냐며 한번쯤 놀란 기억이 다들 있을 텐데요, 어린이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못 봤습니다.

 세월이 점점 더 빠르게 흘러간다고 느끼는 이유를 새 경험이 줄어드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걸 접하는 빈도는 줄고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기 때문에 뇌가 시간을 압축해서 기억한다는 거죠. 똑같은 한 시간이라도 무엇을 했느냐에 따라 뇌는 시간 함수 값을 다르게 매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재미있는 일을 할 때 시간이 빨리 가고, 지루하면 시간이 더디게 간다고 느끼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지루한 경험을 많이 해야 시간이 늦게 가니 결국 세월도 더디게 흘르는 걸까요. 하지만 현재 느끼는 시간의 흐름과 과거를 회상할 때 느끼는 시간의 속도는 다릅니다. 즐거운 경험은 그 순간에는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지만 뇌 속 기억 장치에는 더 긴 시간으로 저장된다는 얘기입니다. 그 순간엔 빠르게 지나가는 행복한 기억이 나중에 회상할 땐 긴 시간으로 기억되는 거죠. 좋은 일만 이렇게 기억나면 좋을 텐데 좋지 않은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이 컸던 기억일수록 기억 저장 장치의 많은 영역을 차지합니다. 과거 나빴던 기억이 인생 전체의 기억으로 대체된 환자도 종종 봅니다. 삶이 불행할 수밖에 없겠죠.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건 죽음에 대한 심리 반응도 영향을 끼칩니다. 남은 시간이 줄수록 일분 일초가 소중해집니다. ‘벌써 일년이 지나갔네’란 반응엔 ‘내 삶이 일년 더 줄었네’라는 서운함과 불안이 담겨 있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삶의 양을 늘리는 데만 집착하기 쉽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지나쳐 생기는 건강염려증도 어쩌면 점점 빠르게 달려가는 인생 속도에 적응하지 못해 나오는 심리 반응인 것 같습니다.

 ‘인생을 지구상에서 보낸 햇수로 재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는 거겠죠.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남은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내고는 “마지막 6개월이 60년 세월이었다”고 고백하는 걸 보면 확실히 우리 뇌의 감성 시계는 똑 떨어지는 디지털 시계는 아닌 겁니다. 건강 걱정하느라 불안 속에서 오래 사는 것보다 용기있게 나 스스로의 감성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게 결과적으로 남은 인생을 더 길게 살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2014년엔 감성 계획을 세워보라고 추천할까 합니다.

 새해 계획은 세우셨나요. 물어보면 대체로 자기 계발과 건강, 이렇게 크게 두 영역으로 나뉩니다. 외국어 공부나 실무 서적 읽기는 자기 계발 영역이죠. 꾸준히 운동하기나 담배 끊기 등은 건강과 관련한 계획이고요.

 자기 계발과 건강 모두 살아가는 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건강하고 능력있어야 생존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뇌는 얄궂게도 생존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행복감을 못 느낍니다. 만약 극단적으로 생존이 위협받다 그 상황에서 벗어났다면 쾌감을 느끼겠지만 그 쾌감을 위해 내 삶을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으로 계속 몰고 가는 건 병적 중독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죽느냐 사느냐, 생존의 스릴을 느끼다보면 뇌의 정상적인 행복 시스템이 다 망가져 버립니다.

 인간은 단순히 생존을 위해 살아가도록 설계돼 있지 않습니다. 생존은 행복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입니다. 행복은 감성이라 주관적인 경향이 강합니다. 객관적으론 행복하기 어려운 환경에서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올해는 자기 계발과 건강 같은 생존을 위한 계획 외에 감성 목표를 정해보면 어떨까요. 감성이 요구하는 목표를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좀 유치한 듯 보이지만 쉬운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먼저 A4 용지 2장을 꺼냅니다. 한 장에는 올해 꼭 해야 할 일을 10개 적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장에는 일년밖에 살 수 없다면 꼭 하고 싶은 일을 10개 적는 겁니다. 평소엔 죽음이란 단어를 생각하거나 이야기하는 게 금기시돼 있죠. 그런 말 꺼내면 재수없다는 소리도 듣습니다만 가끔은 죽음을 생각하는 게 심리적으로 유익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나 죽기 때문이죠.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생존만을 위해 달려가는 동안 우리 뇌는 계속 지쳐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설정하면 내 마음이 하고싶은 계획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이를 버킷리스트라고도 하죠. 올해 꼭 해야 할 일과 ‘1년 밖에 못 산다면’ 가정하고 적은 버킷리스트, 이 둘 사이에 차이가 많다면 너무 생존 위주로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장 죽을 사람처럼 생존을 위한 계획은 다 집어 던지고 마음이 하고싶은 대로만 살 수는 없겠죠. 하지만 최소 계획 10개 중 2개는 내 마음이 하고 싶은 감성 계획을 넣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아마 올 연말에는 지난해보다는 긴 해로 느껴질 것입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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