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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필리핀에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홍통」에서 다음 목적지인「괌」섬에 가려고 했으나 공교롭게도 독점노선인 TWA여객회사가 「스트라이크」 중이기 때문에 필리핀의 마닐라를 거치게 되었다. 입국사증도 없이 내리게 되었는데 마닐라·괌 군항은 1주 2회여서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이 나라는 제3차 여행 때인 3년 전에 속속들이 여행하여 많은 친구를 사귀었었다. 마닐라에 있는 한 벗을 찾으니 「예고도 없이 이렇게 찾아온단 말요! 반갑소, 반갑소. 어서 들어와요』하며 반겨준다.

<낙천 적인 필리핀사람>
내가 도리어 신세를 끼칠 것이 뻔한데도 온 가족이 나를 마치 친척처럼 환영한다. 이 나라 사람은 스페인의 피가 흘러갔기 때문일까, 그지없이 낙천적이며 사람을 반길 줄 안다.
「홍콩」은 본토와 같은 중국인이 사는 섬이면서도 영국적인 무드가 깃들어 있었으나 마닐라는 미국적인 자유주의 사상이 몸에 밴 것 같다. 문화나 문명의 힘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가를 새삼 느꼈다. 마닐라에서 그전에 사귀었던 사람들을 다 찾아다니려면 며칠이 걸릴테니 시간이 없어 그럴 수가 없었다. 찾아가면 모두들 얼마나 반가와하랴. 그렇지 않아도 그전에 다시 꼭 찾아달라고 신신부탁을 했었는데 여기까지 와서 이들을 모두 찾지 않으면 얼마나 나를 탓하랴. 국제적인 우애의 배신자라고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되도록 다 찾아볼 양으로 생각을 하고 먼저 내가 가장 감명을 받았던 곳을 찾기로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노상의 담배 팔이 할아버지였다.
3차 여행 때의 귀국 길에 다시 이 나라를 들르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마닐라의 번화한 거리 한 모퉁이에서 어떤 화교인 할아버지가 길가에 담배 명 개비를 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팔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 할아버지는 마닐라에서 손꼽히는 화교 재벌의 아버지였다.
이 화교의 끈질긴 상혼이 기특해서 기억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이번에 이곳을 들르게 되어 행여나 하고 그때의 그 할아버지가 담배를 팔던 곳을 찾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엔 할아버지가 아닌 할머니가 담배를 팔고 있었다. 그러면 그 할아버지는 홀 앓거나 세상을 떠나서 할머니가 대신 나온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기웃거리고 있었더니 마침 그전에 사귀었던 옆의 가게주인이 나를 먼저 알아보고 『혹시 몇 해전에 여기 왔던 한국 사람이 아니오』하고 반긴다.
몇 년만에 해후가 되는 샘인데, 그는 반가와 어쩔 줄을 모른다. 그는 상인이면서도 나에게 쓰는 돈이 아쉽지 않은지 음식을 시켜오기까지 하면서 그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담배팔이 노인은 작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죽기 며칠 전까지도 이 자리에서 담배를 맡았지요. 비가 쏟아지거나 바람이 몹시 불거나 가리지 않고 나와서 몇 푼 벌이도 되지 않는 담배를 맡았는데 80살이 엄도록 정정했어요. 그는 화교정신의 본보기였어요』라고 말했다. 죽을 때 가지 장사를 하여 돈을 번다는 이 상혼! 장사에 정신을 쏟다보면 병이란 침범할 수가 없는 것일까. 돈 벌고 무병상수 하는 것이 일거양득의 이들의 삶의 철학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화교는 동남아시아는 물론 어떤 나라에 가서도 경제권을 쥐고 사는 것이리라.
그 할아버지는 곤 재벌인 아들이 편히 집에 들어앉아 있으라고 말려도 먼지가 이는 거리에서 담배를 팔았었는데 저녁엔 그의 아들이 세단 차로 모셔 가는 것을 본 그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수성가하여 아들을 훌륭히 성공시키고도 다기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담배장사를 하던 그 할아버지는 위대했다.

<비상한 돈벌이재주>
가게주인은 시켜온 음식을 자꾸 내게 권하면서 『그 할아버지 장례 때엔 조객이 어찌나 많았는지 인산인해를 이루었지요. 큰 재벌의 아버지니 그럴밖에 없지요』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마이더스」왕이 자기 손이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황금으로 바꿔놓은 듯이 하고는 돈을 버는 비상한 재주가 있을 분 아니라 죽어도 돈을 모으게 하는 것이라고….
그 늙은이는 취미로 장사를 한 셈이지만 먹을 것을 꼭 싸 가지고 와서는 돌아갈 때까지 담배 소쿠리 앞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네가 가게를 지키면 가게는 너를 지켜주리라』라는 이들의 금언은 비단 화교만이 아니고 온 세계 사람에게 공통되는 값진 진리가 되지 않을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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