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통」에서 다음 목적지인「괌」섬에 가려고 했으나 공교롭게도 독점노선인 TWA여객회사가 「스트라이크」 중이기 때문에 필리핀의 마닐라를 거치게 되었다. 입국사증도 없이 내리게 되었는데 마닐라·괌 군항은 1주 2회여서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이 나라는 제3차 여행 때인 3년 전에 속속들이 여행하여 많은 친구를 사귀었었다. 마닐라에 있는 한 벗을 찾으니 「예고도 없이 이렇게 찾아온단 말요! 반갑소, 반갑소. 어서 들어와요』하며 반겨준다.
<낙천 적인 필리핀사람>
내가 도리어 신세를 끼칠 것이 뻔한데도 온 가족이 나를 마치 친척처럼 환영한다. 이 나라 사람은 스페인의 피가 흘러갔기 때문일까, 그지없이 낙천적이며 사람을 반길 줄 안다.
「홍콩」은 본토와 같은 중국인이 사는 섬이면서도 영국적인 무드가 깃들어 있었으나 마닐라는 미국적인 자유주의 사상이 몸에 밴 것 같다. 문화나 문명의 힘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가를 새삼 느꼈다. 마닐라에서 그전에 사귀었던 사람들을 다 찾아다니려면 며칠이 걸릴테니 시간이 없어 그럴 수가 없었다. 찾아가면 모두들 얼마나 반가와하랴. 그렇지 않아도 그전에 다시 꼭 찾아달라고 신신부탁을 했었는데 여기까지 와서 이들을 모두 찾지 않으면 얼마나 나를 탓하랴. 국제적인 우애의 배신자라고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되도록 다 찾아볼 양으로 생각을 하고 먼저 내가 가장 감명을 받았던 곳을 찾기로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노상의 담배 팔이 할아버지였다.
3차 여행 때의 귀국 길에 다시 이 나라를 들르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마닐라의 번화한 거리 한 모퉁이에서 어떤 화교인 할아버지가 길가에 담배 명 개비를 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팔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 할아버지는 마닐라에서 손꼽히는 화교 재벌의 아버지였다.
이 화교의 끈질긴 상혼이 기특해서 기억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이번에 이곳을 들르게 되어 행여나 하고 그때의 그 할아버지가 담배를 팔던 곳을 찾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엔 할아버지가 아닌 할머니가 담배를 팔고 있었다. 그러면 그 할아버지는 홀 앓거나 세상을 떠나서 할머니가 대신 나온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기웃거리고 있었더니 마침 그전에 사귀었던 옆의 가게주인이 나를 먼저 알아보고 『혹시 몇 해전에 여기 왔던 한국 사람이 아니오』하고 반긴다.
몇 년만에 해후가 되는 샘인데, 그는 반가와 어쩔 줄을 모른다. 그는 상인이면서도 나에게 쓰는 돈이 아쉽지 않은지 음식을 시켜오기까지 하면서 그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담배팔이 노인은 작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죽기 며칠 전까지도 이 자리에서 담배를 맡았지요. 비가 쏟아지거나 바람이 몹시 불거나 가리지 않고 나와서 몇 푼 벌이도 되지 않는 담배를 맡았는데 80살이 엄도록 정정했어요. 그는 화교정신의 본보기였어요』라고 말했다. 죽을 때 가지 장사를 하여 돈을 번다는 이 상혼! 장사에 정신을 쏟다보면 병이란 침범할 수가 없는 것일까. 돈 벌고 무병상수 하는 것이 일거양득의 이들의 삶의 철학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화교는 동남아시아는 물론 어떤 나라에 가서도 경제권을 쥐고 사는 것이리라.
그 할아버지는 곤 재벌인 아들이 편히 집에 들어앉아 있으라고 말려도 먼지가 이는 거리에서 담배를 팔았었는데 저녁엔 그의 아들이 세단 차로 모셔 가는 것을 본 그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수성가하여 아들을 훌륭히 성공시키고도 다기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담배장사를 하던 그 할아버지는 위대했다.낙천>
<비상한 돈벌이재주>
가게주인은 시켜온 음식을 자꾸 내게 권하면서 『그 할아버지 장례 때엔 조객이 어찌나 많았는지 인산인해를 이루었지요. 큰 재벌의 아버지니 그럴밖에 없지요』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마이더스」왕이 자기 손이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황금으로 바꿔놓은 듯이 하고는 돈을 버는 비상한 재주가 있을 분 아니라 죽어도 돈을 모으게 하는 것이라고….
그 늙은이는 취미로 장사를 한 셈이지만 먹을 것을 꼭 싸 가지고 와서는 돌아갈 때까지 담배 소쿠리 앞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네가 가게를 지키면 가게는 너를 지켜주리라』라는 이들의 금언은 비단 화교만이 아니고 온 세계 사람에게 공통되는 값진 진리가 되지 않을까.<계속>계속>비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