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의 「정권 탈취」 악순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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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년 반전 쿠데타에 의해 집권했던 「그리스」의 「파파도풀로스」 군사정권은 25일 미명 역시 일단의 군부에 의한 「쿠데타」로 무너졌다.
처음 「쿠데타」 소식을 듣고 『악명 높은 독재자 「파파도풀로스」가 쫓겨났다』고 안도의 숨을 쉬었던 「아테네」 시민들은 혁명군의 포고문을 보고 『주역만 바뀌었을 뿐 군복을 입은 사람들의 통치에는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번 「쿠데타」의 주역은 제1군사령관 「파에돈·기지키스」중장으로 되어 있지만 그는 간판 인물에 불과한 듯하며 사실상의 주역은 해병사령관 「이오아니데스」준장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영관「그룹」인 것으로 그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스」 군부 안에서도 「극우파」로 알려진 이 집단은 「파파도풀로스」의 민정 이양 계획에 반대해 왔으며 지난 14일 절정에 이르렀던 학생 「데모」에 대처, 계엄령을 펴도록 앞장선 것으로 보이고 있다.
『국가를 무정부 상태에서 건져내기 위해 구국의 깃발을 들었다』는 것이 이들의 거사 명분이지만 그 동안의 외신을 종합해 보면 군내부의 세력다툼에서 빚어진 것이란 징조가 농후하다.
67년 「쿠데타」로 집권한 「그리스」군부에는 대충 ▲「파파도풀로스」파 ▲「파리」에 망명 중인 전수상 「가라만리스」를 지지하는 파 ▲극우파의 3개 파벌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중에서 공화제 같은 거창한 간판을 내릴 필요없이 군사정권을 유지하자고 주장해 온 극우파 군인들이 이번 학생 「데모」의 진압책임을 「기지키스」장군이 맡은 것을 계기로 사태의 표면상 호전에 안심한 「파파도풀로스」정권의 허를 찔러 「쿠데타」를 단행했다는 것이다.
「파파도풀로스」의 정치 자유화 정책에 반대해 온 「이오아니데스」준장 등 극우파는 74년에 실시키로 된 선거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거사를 한 것으로 「그리스」신정권의 측근 소식통들은 전하고 있다.
특히 「이오아니데스」준장은 지난 8월 「파파도풀로스」에게 3군총사령관으로 「기지키스」중장을 추대했다가 실패한 후 「쿠데타」를 음모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지키스」장군이 망명 중인 「콘스탄티노스」국왕과 친구였다는 사실이 혹 그들간에 사전에 무슨 연락이 있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국왕을 다시 영임 할 의사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낳게 하고 있지만, 아직 그런 징후는 보이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그리스」는 1829년 「터키」의 지배를 벗어나 왕정을 수립했으나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었다.
특히 2차대전 이후엔 공산 「게릴라」의 준동으로 5년간이나 내란을 겪었고 7번의 선거를 치르는 동안 50여 개의 정당이 난립,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했다.
그 동안 2번의 「쿠데타」가 성공했고 정부가 12번이나 바뀌는 홍역을 치렀다.
67년 4월 포병대령 「파파도풀로스」가 군사 혁명을 일으켜 「콘스탄티노스」국왕과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었으나 결국 국왕이 패배, 외국에 망명했다.
금년 5월에 해군의 「쿠데타」가 발발되자 「파파도풀로스」는 1백40년간 지속돼 온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장기 집권의 틀을 굳혔다.
언론 자유를 말살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한 6년여의 철권정치로 국민들의 불만은 누적되어 갔다. 그런 중에도 몇몇 「그리스」지도자와 지식인들은 해외에서 본국 정부에 대한 공격과 비만을 가함으로써 국제적인 여론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다.
이런 판국에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학생 「데모」가 터지자 「파파도풀로스」는 이 유혈 사태가 「타놈」을 실각시킨 태국의 재판이 되지 않을까 우려한 나머지 계엄령을 선포, 계속 강경책으로 나왔다.
혁명의 동기나 구호가 6년전과 비슷하고 혁명집단의 성격이 극우인 이상 「그리스」의 미래는 이미 어떤 한계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칫하면 권력에서 소외된 집단에 의한 「정권 탈취」만이 제1의 목적이 되는 또 하나의 퇴보 내지는 비극으로 전락할 소지도 없지 않다. <김건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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