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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라스베가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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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여긴 완전히 동대문 라스베가스이구나.’

 짧은 고국방문이라 정신없이 바쁘다는 딸들을 억지로 데려왔는데, 눈을 두리번거리고 흥분하며 좋아하는 딸들을 보니 내가 잘했지 싶다. 새벽 한 시가 넘은, 동대문의 의류시장. 길옆에는 관광버스가 즐비하고, 사람들은 커다란 보따리를 짊어지고 우르르 몰려다니고, 그들의 배를 채워줄 포장마차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반짝반짝 네온 불빛은 물결처럼 오르락내리락. 어찌 보면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밤거리 같기도 하다. 일단, 쇼핑백을 어깨에 둘러메고 가까운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요즘 경기가 죽었다고 하더니만 설 대목에 팔 옷가지들을 사러 나온 소매상들인지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거렸다.

 산처럼 쌓여 있는 갖가지 옷들. 그 가운데 딸 눈에 들어온 옷이 있었나 보다. “어머, 예쁘다. 사이즈가 얼마예요?” 물으니 소매로는 안 판단다. 그 말뜻도 못 알아듣고 “어디서 입어봐요? 다른 색도 있어요?”라며 계속 엉뚱한 질문만 해대고 있는 딸. 듣기 민망해서 옆 가게로 데려갔다. 그곳도 소매는 안 한단다. 이익을 붙여 소매 값으로 팔면 되지 않느냐는 말에 “그러면 장사하시는 분들이 싫어해요” 한다. 그러니까 이곳은 ‘도매로 사다가 소매로 파는 양품점 사장님들을 위한 시장’이란 얘기다. 적어도 이 새벽시장은 말이다. 입구에 ‘소매 금지’란 표시라도 해놓든지, 아님 가격을 물었을 때 대답을 말든지. 터무니없이 싼 가격을 알려주면서 ‘하지만 네겐 안 판다’ 하니 약만 더 올랐다.

 퇴짜를 맞고 우울한 얼굴로 빌딩 밖으로 나오다가 마지막 가게 코너에 진열된 스웨터를 무심코 만졌다. “사세요. 사장님 그거 요즘 잘나가요” 한다. 나보고 옷가게 사장이라고? 방법은 있었구나. 큰딸 귀에다 입을 대고 ‘쉬잇, 엄마가 아까 그 옷들 다 사줄게. 엄마 믿고 나가서 쉬고 있어’ 하니 영문도 모른 채 딸들은 나갔다. 휴우, 이제 애들이 맘에 들어 했던 옷들만 사면 된다. 아까 그 가게들을 찾았다.

 다짜고짜 애들이 점찍어 둔 옷을 사면 눈치챌까 봐, 슬슬 고르는 척하다가 맨 나중에 그 옷을 달라 했다. “몇 장요?” 묻는다. 몇 장씩 사는 건가 보다. 들킬까 봐 눈도 못 마주치고 3장이라 했다. 괜찮다. 나도 입으면 되니까. 그런데 한 색만 있으면 팔기 힘들다며 색색으로 가져가란다. 반품도 된다면서. 싫다 하면 탄로 날까 봐 묵묵히 흰색·검은색·벽돌색·카키색 고루고루 3장씩 샀다. 열두 장이다. 괜찮다. 반품도 된다니까. 영수증을 써주면서 어느 가게냐고 묻는다. 얼떨결에 사는 곳을 댔다. “양평요.” 이번엔 상호가 뭐냐 묻는다. 우물쭈물하다가 아까 맛있게 먹은 빈대떡집 이름이 생각나서 “순이네요” 했다. 몸이 오그라들면서 숨이 막혔다. 거짓말도 처음에만 힘들지 점점 익숙해지는지 여러 가게를 돌다 보니 여유도 생기고 심지어는 짜릿하기까지 했다. 원 없이 모두 다 샀다. 한두 장씩 사면 눈치챌까 봐 그들에게 믿음을 주려고 아주 넉넉히 샀다.

 집에 돌아와 물건들을 펼쳐놓으니 다들 기가 막히는지 입을 못 연다. “장사하려고?” 묻는다. “다 너희들 거다” 하니, “이상해서 만져본 옷까지 다 사버리면 어떻게 해.” 엄마 때문에 미쳐버리겠단다. 괜찮다. 안 팔리면(?) 반품해준다 했다. 애들은, 사 온 옷의 반도 입어보지 않고 바꾸란다. 지은 죄 때문인지, 바꿀 일이 걱정이라 그런지. 영, 잠이 오질 않는다. 새벽 4시다. 벌떡 일어나 다시 동대문으로 나갔다. 바꾸려면 빨리 바꾸자.

 그런데 도매시장 반품에는 법이 있단다. 사이즈 교환은 되지만 하나 사서 하나 바꾸는 건 안 되는 거란다. 바꾸려는 물건의 두세 배 되는 물건들을 새로 사면서 반품하는 거라 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더 살 수는 없고요, 그럼 이걸 다 어떻게 하지요?”라 물었다. “친구들에게 하나씩 선물하세요” 한다. 잘 팔아보시란 말 대신에 친구들에게 선물하란다. 얼굴도 못 쳐다보며 꾸역꾸역 사 젖히는(?) 내 꼴을, 그들은 그저 모르는 척 속아줬다는 말이다.

 수북하게 쌓인 저 옷들. 두 달치 아파트 관리비만큼이나 낭비한 돈. 상도덕을 어지럽힌 ‘죗값’인가, 아님 내 꾀에 내가 넘어간 ‘꼴값’인가.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