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태국 … "사상 최악의 위기, 출구가 안 보인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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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방콕 시내의 반정부시위대가 “1월 13일 셧다운 시위를 벌이겠다”며 행진을 하고 있다. 당시 시위는 무탈하게 치러졌지만 지난해에만 시위대와 경찰 충돌로 8명이 사망했다. [사진 론 코벤]

잉락 친나왓 총리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시위대와 다음 달 2일 조기총선 카드로 정면 돌파에 나선 정부가 벼랑 끝 대치 중인 태국. 분수령은 13일로 예정된 ‘셧다운(정부 마비) 시위’다. 시위대는 방콕 시내 주요 지점 20곳에서 수만 명이 교통을 마비시키고 정부기관 건물을 단수·단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정부도 11일 1만4000명에 달하는 경찰 병력을 시내 곳곳에 배치했다. 이날 새벽엔 이미 방콕 시내에서 두 건의 총격사건이 발생했다. 시위대 7명이 부상을 입었고 한 명은 중태다. 일촉즉발의 위기 현장에서 호주인 태국 전문기자 론 코벤이 르포를 보내왔다.

‘셧다운 시위’를 이틀 앞둔 11일은 태국의 어린이날이다. 위급한 상황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다. 친구의 대학교 졸업을 축하해 주겠다고 집을 나서는 아들을 말리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폭풍 전의 고요다. 10일 오전 3시쯤 시위대 한 명이 경찰 총격으로 사망했다. 거리 곳곳, 특히 반정부 시위대가 마비시키겠다고 선언한 수도·전기공사 건물은 경찰이 철통수비 중이다. 군 쿠데타 소문은 군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반정부 시위 일색인 것은 아니다. 잉락 총리와 조기총선 실시를 지지하는 세력도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양측의 충돌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지난해 3월까지만 해도 잉락 정부는 건재했다. 태국 바트화와 주가지수는 각각 5년과 19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았다. 외국인 투자자금은 44주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늘었다. 정치는 새내기였지만 기업가 출신인 그가 경제를 살려 줄 것으로 태국인들은 기대했다. 그러나 희망은 머지않아 실망으로 변질됐다. 그가 정치사면법을 들고나오면서다. 부정부패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은 뒤 해외 도피 중인 오빠 탁신 전 총리를 사면하기 위한 노림수가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다. 격렬한 반대 시위로 정치사면법이 상원을 통과하지 못하자 잉락 총리는 2월 2일 조기총선 카드로 맞불을 놨다. 총선 후 실시할 정치개혁안도 발표했다.

 그러나 잉락의 승부수는 야당과 시위대의 거센 반발에 막혔다. 시위대의 중심엔 수텝 트악수반(64) 전 부총리가 있다. 그는 반정부 시위대 핵심인 국민민주개혁위원회(PDRC) 사무총장도 맡고 있다. 태국 제1야당인 민주당 출신 수텝은 잉락 총리에 반대하는 시위를 지난 수주일 동안 주도해 왔다. 그는 잉락의 조기총선 카드가 시간 끌기용 꼼수라며 잉락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백발에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를 가진 그는 과감한 정치 개혁도 약속했다. 그는 “부패선거 척결을 통해 태국을 개혁하고 돈으로 산 권력이 아니라 민심을 진정으로 대표하는 권력을 세울 것”이라고 밝혔다. 야권이 조기총선에 반대하는 건 탁신의 영향력이 여전히 무시 못할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민주당을 이끄는 아피싯 웨차치와 대표가 잉락·탁신 남매의 부정부패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국민은 더 이상 정당을 못 믿는다”며 “누가 당선되든 불복할 게 뻔하고 국민조차 외면한 선거를 왜 치르느냐”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부와 여당인 푸에타이당의 조기총선 의지도 확고하다. 여당 지지자들은 “조기총선이야말로 태국의 민주 절차를 순수하게 지켜 나갈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고 주장한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총선을 미룰 것을 권고했고 공무원연합회마저 선관위의 권고를 지지하고 나섰지만 총선은 그대로 실시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총리실 사무총장인 수라난드 웨차치와는 “현재 태국인들은 두 편으로 갈라져 자신들의 방법만이 나라를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다”며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조기)총선으로 국민의 뜻을 묻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주주의에선 응당 의견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라며 “선거를 통해 이를 거르고 그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덧붙였다.

 취재 중 만난 태국시민들의 입장은 엇갈렸다. 시위대 일원인 키티나(가명)는 정보기술(IT) 업계에 종사하는 평범한 20대 여성이다. 그는 “현재 태국의 시스템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인들은 국민을 위하는 척하면서 결국 자기들의 사리사욕만 채운다. 조기총선 역시 의도가 불순하다. 탁신의 부정부패를 덮고 가려는 꼼수”라고 말한 뒤 목청을 높여 시위 구호를 외쳤다. 또 다른 시위대인 박사 과정 대학원생 낫(가명)은 “변화에 목말라서” 시위에 가담했다고 했다. 그는 “나라가 바른 방향으로 변해 가는 걸 보고 싶다. 우린 태국인이다. 우린 태국 정치인에게 이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위대에 눈살을 찌푸리는 시민도 있다. 홍보전문가인 아치라야 왕키앗은 “셧다운 시위라는 건 너무 심하다”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시민이 입을 것이기에 반대한다. 빨리 이 사태가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수텝과 PDRC가 조기총선 저지를 위해 격렬한 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지난달 이미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지난달 말엔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에서 학생 한 명과 경찰관 두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만 명의 시민이 최루탄 가스 세례를 받았다. 학생운동 지도자인 니티톤 람후에아는 “총선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다. 정치 개혁 조치는 그전에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린 조기총선에 완강히 반대하지만 총선 자체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공정선거가 실시된다는 보장만 있다면 태국인들은 환영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13일 수텝과 PDRC가 계획하고 있는 셧다운 시위의 여파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 최대 피해자는 태국 경제이자 태국인들이다. 주가는 폭락했고 태국의 주요 산업인 관광업계는 장기간 개점휴업 상태다. 방콕 주재 외국대사관들은 자국 시민들에게 방콕 시내 위험지역엔 접근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각국 항공사들은 태국행 항공편을 취소하고 있다. 이미 100여 편이 시위 기간에 취소됐다. 태국여행업협회는 “방콕에 오는 모험을 감행하는 관광객들에겐 최대한 안전한 대체 프로그램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했다. 티스코 경제전략연구소는 “방콕뿐 아니라 태국 전반에 상당한 악영향을 오랜 기간 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티스코 측 관계자는 익명을 전제로 “조기총선이 실시되고 새 정부가 들어선다고 해도 경기부양책을 쓸 여력은 없다. 정치 개혁에 초점을 맞춰야 민심을 달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수텝 트악수반 전 부총리는 반정부시위대 핵심 인사다. 시위대 주축세력인 국민민주개혁위원회(PDRC) 사무총장이다. 인자한 웃음과는 달리 강경파다. (아래 사진) 반정부시위대에선 “거짓말과 부정부패는 이제 그만”이라는 피켓이 많이 등장한다. [사진 론 코벤]

 지난 석 달간 시위로 이미 8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태국 경제에도 먹구름을 드리웠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10일(미국 뉴욕 시간) 신년 기자회견에서 중재에 나서겠다고 했지만 쉽진 않아 보인다. 13일 시위가 어떻게 전개될지가 태국의 운명을 가를 관건이 될 것이다. 출라롱콘대학교의 티티난 퐁수디락(정치학) 교수는 “셧다운 시위 후 2~3주는 태국 역사상 가장 험난한 정치적 위기와 불확실성의 순간이 될 것”이라며 “반정부 시위대와 정부가 물리적으로 충돌하면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태국 군의 선택도 흥미롭다. 현재까진 논란의 중심부에서 비켜나 있지만 태국 군은 “만약 폭력사태로 번지면 즉각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번 시위가 더 큰 위기의 서막일수도 있다는 방증이다.

 티티난 교수는 “이번 위기는 태국 역사상 최악이다. 하나가 아닌 다층적 문제들이 얽히고설켜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더 나쁜 건 출구가 안 보인다는 것이다. 단지 시간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고 말했다.



론 코벤 호주연합통신(AAP) 기자로 태국어에 능통한 태국 전문가. 태국을 거점으로 25년을 아시아에 거주하며 주로 태국의 경제·정치 부문에 대해 기사를 써 왔다. 태국 여성과 결혼해 21세 아들 제이슨을 뒀다.

온라인 중앙일보·전수진 중앙 선데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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