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9)제32화 골동품 비화40년(30)|<제자 박병래>박병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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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찬영씨의 철사필통>
김찬영씨는 평양출신으로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아 넉넉한 재력으로 값진 물건을 많이 사서 모았다.
해방 전부터 골동을 모은 사람이면 김씨의 물건이 깨끗하고 뛰어난 우품들만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김씨는 나와 자주 만나고 상종했던 터였다.
지금 기억에 1937∼38년께의 일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김찬영씨가 일본동경의 경매장에 물건을 내놓아 17만원에 물건이 팔려 상당히 재미를 보았다고 소문난 일이 있었다. 경매에 내놓아 물건을 파는 사람이야 다 제각기 소견이 있어서 그랬을 터이지만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갔다.
재산도 넉넉하겠다 이 세상에 남부러울 것이 없는 김씨가 더구나 깨끗이 모은 물건을 어째서 한목에 내놓는가 하는 점이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취미로 모으는 이상 절대로 물건은 안 팔기로 작정한 바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김찬영씨는 자기 물건을「테스트」하기 위해서 경매에 붙여 보았다는 것이다.
뒤에 창랑이 경매를 해본 것도 김씨가 재미를 보았다는 얘기에 자극을 받은 점도 있다.
김찬영씨는 원래 상야미술학교를 나와서 조형미술에 상당한 심미안도 갖추었으므로 그 나름대로 좋은 물건을 고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그 당시 거간을 통하지 않고는 물건을 사 모으는 일이 쉽지 않았건만 어떻게도 용케 좋은 것만 갖추었다.
김씨의 물건 가운데 나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는 것으로는 6각병과 철사바탕에 청화로 용을 그린 필통이었다.
6각병은 완자모양의 족대를 진사로 바른 아주 희귀한 물건이었으며 필통도 보기 드물게 뛰어난 일품이었다. 1935년에 나온『조선고적도보』에 보면 태제명이란 사람의 것으로 나와있는데 내가 어찌나 갖고 싶었던지 김씨에게 여러번 내가 가진 어떤 물건과 바꾸자고 졸랐던 일이 있었다.
하지만 김씨는 번번이 적당한 구실을 붙여 나의 간청을 거절하고 말았다.
원래 그 필통의 소유주인 태재명은 서대문 근처에서 개업하고 있었던 변호사였다. 특히 그의 부인이 현재의 제일은행본점 뒤에서 왜전골집을 경영하고 있어 요새와는 달리 바닥이 좁은 서울 장안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우리도 가끔 그 왜전골집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 집의 특색은 손님에게 일본 덕리병 하나 이상은 절대로 술을 안파는데 있었다. 말하자면 부인 덕택에 유명해진 변호사라고 할까, 하여간 그가 그 필통을 김찬영씨에게 2백원에 팔았다는 얘기가 들렸다.
요사이와는 사정이 조금 다른 것이 어느 누가 어떤 명품을 가졌다고 하면 대개 소문이 난다.
또 원매자가 거간을 대서 부득부득 졸라대면 아무리 애지중지하는 물건이라도 팔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하여간 2백원에 그 필통을 기어코 빼내었으니 김찬영씨의 집념도 대단했던 것이다.
해방 후 김씨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아주 비운에 빠지게 되었다.
부족한 것을 모르고 지내던 그가 별안간 몰아닥친 가난과 함께 몸이 불편하니 옆에서 보는 사람 역시 딱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5만여원이란 거금을 주고 산 연적을 잃고 언어가 부자유스러운 가운데 나를 붙들고 눈물짓던 일이 생각난다.
그 연적은 수구가 있는 곳에 개 한 마리가 한쪽다리를 들고 귀를 긁는 시늉을 하고 있는 아주 보기 힘든 물건이었다. 그 연적이 발견된 것은 아마도 예성강하구의 용배도 쯤인가 한다. 용배도는 고려 때 개성에서 쓰이는 각종 물자를 수급하는 양륙장이었기 때문에 그 근처에서 청자가 많이 발굴되어 한때 호리꾼이 크게 발호한 일이 있었다.
앞서 말한 그 연적도 일찍부터 매출행상을 하던 장모씨가 그곳에서 파낸, 모양인데 해방 후 그것이 일시 압류되었다가 어떻게 해서 김씨가 그 사정을 모르고 산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연적의 행방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연적과 함께 적잖은 가산마저 슬슬 빠져나가고 병고에 시달리게 되니 김찬영씨의 말로는 한결 애처로와 보였다. 더우기 6·25사변이 일어나기 여러해 전에 세상이 떠들썩하던 권총강도사건의 피해자가 김씨 부인이었으니 한층 충격이 컸을 것이다.
그때 세상이 혼란하고 치안질서가 제대로 안잡혀서 그랬는지 하여간 무장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무서운 일이 흔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날 저녁 회현동에 있는 김씨의 집에 육혈포를 든 강도가 침입했는데 부인이 항거를 하자 육혈포를 쏴 그만 비명에 가게하고 말았던 것이다.
남의 불운한 말년을 자꾸 들추는 것은 언짢은 일이지만 골동을 통해 깊이 사귀고 말년에 특히 나에게 말못할 고정을 호소했던 그 인간관계를 돌이켜 본 것뿐이다.
김찬영씨는 그토록 골동을 좋아하다가 간 사람의 하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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