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는 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어느새 11월.
예 같으면 이 달에 제일 먼저 생각나는 날이 있었다. 「학생의 날」.
지금 학생의 날은 없다. 왜 학생의 날이 없어졌는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학생의 날이 있었는지, 그것이 어느 날이었는지를 아는 사람도 흔하지 않다. 당초에 왜 학생의 날이 있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더욱 흔하지 않다.
세월은 흐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잊는다. 어쩔 수 없이 잊는 것, 애써 잊으려고 잊는 것…, 사람들은 잊고, 그리고 새것을 배운다.
학생들은 오늘도 학교를 다니고 배우고, 그리고 시험을 친다. 달라진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제의 학생과 오늘의 학생 사이에는 원가 모를 변화가 보인다. 「나치」 독일의 교과서들은 용기와 질서를 강조했었다. 그 때의 질서란 물론, 「나치」적인 질서를 말했다. 그리고 그 용기도 「질서」를 지키는 용기만을 말했을 것이다. 그밖에 「나치」질서에 대립되는 것에 대한 「용기」(?)쯤을 뜻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서독의 교과서는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까.
「스위스」의 학생들은 자유와 규율의 미덕을 배운다. 양자는 전혀 일률배반 적인 것이다.
그런 배반 성을 조금도 모순된 것으로 느끼지 않는 것은 자유의 전통이 뿌리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규율을 위해 자유를 희생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규율을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오랜 역사를 통해 배운 탓이다.
영국의 교과서는 신사도를 최고의 미덕으로 가르친다. 신사(젠틀맨)란 언제나 약자를 편들어야 한다.
그리고 인내와 근면과 자제를 배운다. 왕년의 대영제국의 밑받침이 된 것, 또는 지금도 그 국민이 대영제국의 잔조를 누릴 수 있게 만든 것도 이런 「젠틀맨 쉽」의 교육의 덕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엊그제까지 미국의 교과서는 자유와 개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사회는 마냥 획일화되어만 갔다.
이 때문에 개성도 자유도 파멸되어가며 있다는 비명들이 들린다. 혹은 자유를 짐스럽게 여길 만큼 사회가 병들어 갔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미국은 자라나고 있다. 온갖 병균에도 불구하고 용케 이겨 나가며 있다. 개성의 교육이 어느 사이엔가 관용과 융화의 풍토를 마련해 놓았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네 교과서는 착한 어린이가 되기를 처음부터 강조하고 있다. 어린이는 누구나 착하기 마련이다. 착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어린이나 학생 쪽에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학생들에게 어제나 오늘이나 다름없이 뭣 보다도 착하기를 바란다. 착한 어린이들 앞에서 착하기를 가르치기는 매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마냥 착하기만 한 학생들에게는 의문이 없다. 혼자 길을 찾아 나갈 힘이 없다. 자라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라도 자라기는 어려울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