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1)<제자 박병래>|<제32화>골동품비화 40년(2)|박병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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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집안망치는 골동>
1930년대 초에 수표교근처의 창낭 장택상 씨 댁 사랑방에는 언제나 연연한 인사들이 모여들어 골동얘기로 세월을 보냈다. 집주인인 장택상 씨는 물론이고 윤치영 씨 또 치과의사인 함석태 씨와 한상억 씨(한상룡 씨의 계씨), 그리고「전각가인 이한복 씨와 이만규 등 이 자주 만나곤 했다. 그리고 나와 화가 도상봉 씨, 또 서예가 손재형 씨와 이여성도 거기에 끼였는데 하는 얘기란 처음부터 끝까지 골동에 관한 것뿐이었다.
저녁때가 되면 그 날 손에 넣은 골동을 품평한 다음 제일 성적이 좋은 사람에게 상을 주고 늦으면 설렁탕을 시켜 먹거나 단팥죽도 시켜 놓고 종횡 무진한 얘기를 늘어놓다 헤어지는 게 일과였다.
골동을 동락하는 여러 인사 가운데 나는 연배로 보아 비교적 손아래였지만 역시 골동취미 덕분에 막연한 사이가 된 셈이다. 거기에 모인 인사는 저마다 내 노라하는 수장 가였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또 그 나름의 특징이 있었다.
창낭은 좋은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었거니와 골동품을 사고 파는 데도 임기응변의 기지를 엿보였다. 함 씨는 그 열성이 하도 대단해서 심지어 기인 소리를 들을 정도의 일화를 남긴 분이다. 그 때만 해도 골동품이 이후에 반드시 큰 재산이 되리라는 기대는 일반적으로 희박했다. 다만 만주사변이 터지기 직전까지 세계공황으로 골동품 시세가 여지없이 떨어졌다가 경기가 회복되면서 상대적으로 청자와 백자가 줄어들자 별안간 금값으로 치솟았는데 그것도 대강은 일인들의 극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려자기와 일본인들이 특히 미치다 시피 하는 다기 류를 빼고는 썩 좋은 물건이 아니면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다. 호주머니가 가벼운 대학 교수나 나같이 취미를 우 선으로 아는 사람은 어쩌는 수가 없이 한 가지 계통의 품목에나 정성을 쏟고 값싸게 얻는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그러므로 창낭 댁 사랑을 드나들면서도 골동품이 돈을 벌게 한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다. 처음으로 취미가 생기기 시작하니까 마음에 드는 물건만 보면 사고 싶은 충동으로 견딜 수가 없게 되었는데 그 때 선친이 아직 생존해 계셔서 용돈을 타 썼으므로 으레 아버지를 속여 돈을 타냈다.
아주 우스운 얘기지만 우리 선친은 만학이시기 때문에 양 정 학교를 나와 함께 다니셨다. 그것도 바로 2년이 상급생이셨다. 그래서 나와 교분을 가진 친구는 웬만하면 다 알고 계셨다. 한 번은 함석태 씨를 보고「함 선생, 골동을 하면 망한다는데 어떻소』하고 물으시니까 함 씨가『그야 서화를 해야 망한다지만 골동은 안 그래요』라고 대답했다. 당시 윤치오 씨 같은 분은 서화 때문에 재산을 탕진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있었다.
나는 월급을 모두 골동에 써 버리고 아버지에게 양복이나 책을 산다고 돈을 타내면 으레 또 골동 가게로 줄달음질 쳤다. 이렇게 되니까 내가 골동에 취미를 붙인 것은 어쩌는 수가 없이 부자사이에 양해가 이루어진 셈이나 그래도 아버지는 볼 적마다 못마땅해 하셨다.
한번은 고려 탕 기를 막 사다가 우물에 가서 씻고 있는 참이었다. 아버지에게 들켰는데 꾸지람을 치실 줄 알았더니 부드럽게 얼마 짜리 냐고 물으셨다. 30원 짜리 였는 데도『3원 주었어요』하고 아버지를 또 속이니 곧이 들으시고『비싼 건 아니구나』하시던 말씀이 기억이 난다. 골동 취미가 일단 단계를 지나 속된말로 미치다 시 피하니까 완전히 손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신문에 이런 얘기가 나서 사회적으로 큰 화재가 된 일이 있었다.
경도대학의 준 야라는 교수가 책에 미쳐 도서관에서 귀중한 전적을 훔치다가 들킨 일이 있었다. 그 교수는 망신만 당하고만 게 아니라 구속이 되어 교직마저 빼앗겨 일신을 망치는 꼴이 되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 교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탐이 나는 물건이 어찌나 갖고 싶었던지 훔치고 싶을 정도였다. 한편 그렇게 갖고 싶어하던 물건을 한사코 손에 넣고야 마는 나는 주위의 여러 사람이 자주 전매하는 것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어떤 물건이든 내 손에 들어오고 나면 그만이니까 나중에는 골동 상에서 먼저 야단들이었다. 그래서 물건을 좀 내다 팔아야 할 게 아니냐고 성화를 했다. 내 물건은 수백 점이 되어도 어느 누구고 전부 구경조차 해 본 일이 없다.
골동에 처음 취미를 붙였을 무렵에 산 청화백자각병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가지고 있지만 이 병은 병 구가 조금 깨져서 10원에 사서 골동수리 전문점에 갖다 주었다.
수리를 마친 후 주인의 말이『선생 ,그 병 원매 자가 있는데 안 파시겠소?』하면서 부득부득 조르는데 한 달 전에 살 적의 값에 70원을 받아 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간신히 그 병을 되찾아 왔는데 그 이후로는 물건을 산후에는 되도록 남에게 알리지 않는 전법을 썼다. 그런데 골동 가에서 자기가 산 물건은 자랑을 않고 시치미를 떼는 경향은 1940년대에 들어오면서 골동품 수집 열이 왕성해지자 한층 심해졌다. 심지어 가짜가 많이 나돌 때에는 감정을 해주고도 그것이 가짜라는 결정적인 말을 못해 주는 무서운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요새 값을 물으면 맞히기가 어렵다.
여러 해 전에 누가 불상 하나를 산 일이 있었다. 그 때 상당한 값을 주었던 모양인데 그 뒤 김 모라는 사람의 감정으로 가짜라고 들통이 나고 말았다. 그러자 가짜라고 판정을 내린 김 모 씨가 판 사람과 산 사람의 양쪽에 똑같이 죽도록 얻어맞고 한 보름동안을 입원한 일이 생겼다. 가짜라고 해도 이렇게 함부로 감정을 해주었다가는 폭행을 당하는 일이 생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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