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4)<제자 박갑동>|<제31화>내가 아는 박헌영(173)-박헌영의 체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임화·이강국·이승엽 등이 체포된 후에도 박헌영은 정식으로 체포당하지 않고 얼마간 자택에 연금 당해 있었다. 그래서 당시 평양에서는 박헌영은 『체포 못한다』, 또는 『체포 안 한다』는 등의 소문이 돌았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종국적 목적은 박헌영을 체포하여 자기의 「라이벌」을 말살하는데 있었다. 김일성의 「라이벌」은 연안파의 김요봉·최창익도 아니고 소련파의 허가이도 아니었다.
자기보다 우월한 투쟁경력과 실력과 신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남로당이란 큰 조직을 가지고 있는 박헌영이었다. 김일성은 박헌영에 대하여 늘 위협 당하는 것 같은 압박감과 열등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의 김일성 박헌영 허가이 3인을 뭉쳐 쥐고 지도하려는 「스탈린」이 때마침 죽었다는 것이 김일성에게는 박헌영을 말살해버리고 일인독재를 펴는 절호의 기회였다.
김일성은 남로당을 숙청하는데 있어서 연안파를 회유하여 최창익과 윤공흠에 부수상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미끼로 하여 완전히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최창익은 부수상을 시켜주었으나, 윤공흠은 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에 1956년 8월 중앙위원회에서 윤공흠이 북로당 유사이래 처음으로 김일성을 공박하는 토론을 하여 반 김일성 운동을 일으킨 사건이 발생하였다).
소련파에 대하여서는 소련파의 대표 허가이에게 미움을 받고있던 남일(인민군 총 참모장)파 방학세(내무상)를 자기편으로 끌어넣었다. 남일은 l949년 그가 교육성 부장시절에 과오를 범하여 허가이에게 비판을 당하여 소련으로 추방당할 뻔하였기 때문에 소련파 주류에서는 떨어져있었다.
그러던 것이 50년 동란이 일어나 인민군 총 참모장 강건이 지뢰를 밟아 폭사하게 되자 소련파 중에서는 남일이 소련의 군사계급이 제일 높았기 때문에(포병소령) 소련의 군사고문들이 임시로 총 참모장에 뽑아 올린 것이었다. 야심만만한 박창주에게는 부수상을 시켜주겠다고 회유하여 김일성은 자기편을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파의 쟁쟁한 분자들인 중앙당조직부장 박영빈·김승화·박의완 등은 간단히 매수 당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김일성의 전술의 특징은 각개격파였다. 남로당을 숙청하는데 일시적 이용물로서 연안파를 자기편에 붙이고, 친 남로당 경향으로 돌아서는 허가이를 암살하고 허가이와 사이가 좋지 못한 남일·방학세·박창옥을 자기편에 붙여 남로당을 고립시켜 놓고는 숙청하기 시작하였던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일성이 접근하여 오면 그것은 반드시 이용하려는 저의에서이지 참으로 친하기 위하여서 접근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미연에 알아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의 이러한 수단을 안다하면서도 실제로는 이 수단에 다 넘어가고 말았다.
김일성은 수사기관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재정상인 최창익을 시켜 박헌영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것은 옛 조선공산당시절의 화요 파(박헌영)와 ML파(최창익)와의 구원을 이용한 것뿐만 아니라 최창익 개인과 그가 속하는 연안파에도 단단히 연내책임을 지워 뒤에 아무 말도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김일성은 박헌영을 체포하여 아무도 모르게 평북 천산군 내의 어느 산 속 오두막집에 감금해놓고는 자기들이 꾸민 「시나리오」의 조서를 승인하고 지장을 찍으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박헌영은 완강히 거부하였었다. 박헌영은 김일성도 당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 실로 2년 동안 고군분투하였었다.
한편 김일성은 평양에서 남로당의 고급간부 전원에 대하여 박헌영에 관한 어떠한 사소한 겸함이건·과오건 빠짐없이 지적, 비판하여 고발하라고 강요하였었다. 박헌영에 대하여 가차없이 비만공격을 하면 당성이 강한 사람으로 인정하여 용서하고 당내에 둘 것이며, 만일 그렇지 않고 박헌영에 대하여 비판하지 않으면 곧 간첩 박준영 일파로 몰아 출당 실직시키겠다고 협박하였었다.
진흙발로 박을 짓밟으라는 것이었다. 박헌영을 배신하며 거기다가 타장까지 하라고 강요당한 남로당 고급간부들 중 몇 사람은 강요를 거부하고 자살 또는 숙청을 당하였으나 대부분의 간부는 당장 살기 위하여 김일성의 강요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경공업성 부상 김정권은 이를 거부하고 권총으로 부부가 자살하는 길을 택하였다.
1925년 제1차 공산당조직당시부터의 동지인 홍모식은 할 수 없이 살기 위하여 회의에 참가하여 박헌영을 비판하였었다. 강문석은 박헌영을 비판할 재료가 없어 하도 딱하여 l946년1월3일 3상회의 결정지지 서울시민대회 때 자기와 같은 고급간부까지 위험한 「데모」의 선두에 세운 것은 박헌영이 간부를 아끼지 않으며 미제의 「테러」앞에 귀중한 간부를 내바친 간첩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김일성에게 아첨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박문규는 농업성 안에 있는 자기가 채용한 남로당 출신의 간부들을 전부 축출하여 오르지 김일성이 시키는 대로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렇게 하여 겨우 그 자리를 유지하여 숙청을 모면하였다.
그때 정태식은 그 숙청 선풍 대문에 일시 정치보위부에 검거 당하여 뒤에 석방은 되었으나 농업성에서는 끝내 쫓겨나고 말았었다. 박문규는 직장에서만 이남출신자를 다 쫓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집에까지 이남출신 사람은 절대 출입을 못하게 금지하였었다. 심지어 자기의 처제까지 자기 집에 오는 것을 금지하였었다.
이렇게 철저하게 비인간적인 행동으로 이남출신 사람들과의 인연을 끊고 박문규와 최원택(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되었다가 조국통일전선 의장단의 일원이 됨)만이 추방 숙청을 면하고 자기의 천수를 다하였으나 그 나머지 사람들은 박헌영을 비판하고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하여도 결국은 다 추방당하여 불쌍하게 죽고 말았다.
나는 그때 홍승식 강문석 박문규 등의 처사를 들고 비겁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하였으나 깊이 생각하여보니 그 사람들을 비난하기보다 김일성의 수법이 얼마나 악랄한가를 더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박갑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