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제4화 살마소의 명도공 14대 심수관씨(2)|<제1장 자랑스런 「귀화인」의 후예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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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풍광 명미한 녹아도 시>
동경에서 1시간50분만에 비행기는 녹아도 공항에 내려앉았다. 위도로 따지자면 녹아도 시는 북위 31도35분으로 「아프리카」대륙의 「카이로」와 같은 위치이지만 기후는 전혀 달라 사시사철 아열대지방의 상온, 살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녹아도 시에는 바닷길 4㎞ 밖에 안 떨어진 앵도에 지금도 연기를 뿜고 있는 활화산이 있어 폭발위험 속의 「드릴」조차 맛보게 한다.
국내선 비행기는 「코발트」색 하늘과 남국의 싱그러운 숲을 지나 녹아도 만 한가운데 시커멓게 솟아있는 활화산을 왼쪽으로 스치면서 광활한 고원지대에 기수를 내렸다.
앵도의 화산은 녹아도 남성미의 「심벌」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활화산의 분화는 30회 가량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1914년의 분화는 대규모였으며 최근에는 2차대전이 끝난 다음해인 1946년에도 폭발했었다.

<의외의 발견 「고려」지명>
지금도 간혹 검은 연기가 꾸역꾸역 나오며 보통 때는 흰 연기를 내뿜고있다.
1시간 반 이상을 차로 달리자 조용하고 깨끗한 녹아도 시내로 들어섰다.
흰색 벽칠을 한 건물이 많아 더욱 깨끗해 보이지만 시내에는 구식을 그대로 간직한 회고풍 전차가 그대로 달리고 있어 이 고장 인심을 추측케 한다.
도진가 77만석의 성하정으로 고풍을 자랑하던 녹아도 시는 1945년 전쟁 때 대폭격으로 시내가 거의 불타버리고 종전 후 완전히 재건되었다. 시가에는 높이를 자랑하는 「빌딩」보다 4, 5층의 건물이 고루 들어서서 남국특유의 「코발트」색 하늘아래 조는 듯 했다.
묘대천의 심수관 가를 찾아가기 위해 내일의 여정계획을 세우려고 녹아도 현 지도를 펴들었다.
묘대천은 녹아도 시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가야 한다.
녹아도 시가지도를 살피던 눈에 선뜻 고려정이란 활자가 못 박힌다. 서녹아도 역 동쪽에 또렷이 「고려정」이라고 씌어 있는 것이 아닌가.
또 고려정 바로 북쪽에는 갑돌천이 있고 그 갑돌천에 걸려있는 다리 이름이 고려교라고 인쇄돼 있다.
이 남녘 땅 녹아도 시내에 지금까지 고려정과 고려교가 남아있다니 무슨 까닭일까.
눈을 비비고 더 자세히 지도를 들여다보니 우편국 표시기호 ○밑에도 고려 우편국이란 것이 있다.
「카메라」를 찾아 걸머지고 당장 현장답사에 나섰다.
시내는 새로 구획정리가 되어 대부분 「블록」이 반듯반듯하여 지도를 보며 찾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도중 미심쩍어 세 사람의 행인을 불잡고 물어 보았다.『「고마바시」가 어디 있읍니까?』
세 행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도엔 고려교가 갑돌천에 걸려 있다고 나왔으니 먼저 개울을 찾기로 했다.
갑돌천을 찾아 이번에는 근처에 사는 아낙네를 붙잡고 또 물었다.

<초라한 고려정 우편국>
『「고마바시」가 어디에 있읍니까?』
어린애를 안고 있던 이 아낙네도 또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아주 오래된 다리인데요. 이 근처에 있는 것으로 알고 찾아왔읍니다.』답답해져서 지도를 내보이자 이 아낙네는『아!』하는 감탄사와 함께 말했다.『「고라이바시」말이군요. 바로 저 옆에 있읍니다.』
동경교외에 있는 「고마」 신사 등 고려를 「고마」라고 읽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도 고려교를 「고마바시」라고 불러, 모두 알아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고려교는 낡았지만 「아치」형의 돌다리로 제법 늠름하다.
지금은 그 위로 「아스팔트」가 깔리고 자동차가 다니고 있다. 다리 앞 석주에는 「고려교」라고 또박또박 새겨져 있었다. 폭이 8m정도 밖에 안되기 때문에 자동차 전용도로로 쓰이고 약간 떨어져 보행자만을 위한 새 「콘크리트」다리가 세워져 있었다. 고려교를 건너 서 녹아도 역으로 통하는 중앙로의 횡단보도를 건너니 깨끗한 「빌딩」가가 나타난다. 바로 이곳이 이른바 고려정. 지금은 서녹아도가 발전됨에 따라 그 중심부가 되어있지만 옛날에는 갯벌이었음에 틀림없다. 한국에서 온 도래인들이 피땀 흘려 개척한 부락인 것이다.
고려 우편국을 다시 여학생에게 물어 찾아갔다. 「빌딩」가에 있는 우편국치고는 참으로 보잘 것 없이 초라했다.
『고려정 우편국』나무현판이 몹시 낡아 보였다. 이 고려정 일대는 임진왜란 때 끌려온 우리 나라 사람들이 모여 삶의 터전을 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양식 본뜬 고려교>
그렇지만 이곳은 심수관 가 등이 뿌리를 내린 묘대천 일대와는 또 다른 「뉴앙스」를 풍기는 고려의 지명이라 할 수 있다.
고려교가 문화재로 지정되지도 않았는데도 지금까지 그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은 도래인들이 얼마나 그 당시 기술과 정성을 이 다리 건설에 쏟았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갑돌천에는 여러 개의 다리가 있지만 우조 「아치형」다리는 이 고려교 하나뿐.
세개의 「아치」를 안배한 구름다리식 「폼」은 우리 나라 석조다리 건축양식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정유재침 때 남원성 함락 후 후퇴하는 도진의홍과 함께 녹아도로 온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는 주가전이 있었다.
이 주가전은 왜군이 남원성을 침공할 때 길잡이 노릇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군이 후퇴하자 목숨을 붙일 길이 없게된 주가전과 그 가족들은 왜군을 따라 와 도진의홍 밑에서 녹을 받아먹고 살았다.
이 주가전 이외에도 끌려온 많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녹아도 시내에 새 삶의 부리를 박았던 것이다.
묘대천의 심가를 비롯, 신 이 박 변 임 정 차 강 진 최 여 김 백 정 하 주 등 17성으로 알려진 도공들 일족들이 묘대천에 자리를 잡기 조금전의 일이다.

<도진도 도공 뜻 못 꺾어>
묘대천에서 도공일족들이 가마를 걸고 도자기를 굽기에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도진의홍은 특명을 띤 부하를 보냈다.
『녹아도 성하정에 와서 살도록 하라. 살집도 주고 특별히 보호도 해줄 터이다』뜻밖에도 도진의 이 호의는 굳센 반대에 부닥치고 말았다.
『고마우신 말씀이지만 녹아도의 성하정으로는 들어가 살 수 없읍니다」
의외로 여긴 부하는
『도진공의 높으신 뜻인데 어길 수 있겠느냐』고 대어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조금도 두려운 빛 없이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
부하는 하는 수 없이 옮기지 못하는 이유를 물었다.
『녹아도 성하정에는 주가전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민족을 판 배신자로 우리의 불구대천지 원수입니다.』
묘대천 도공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도진의홍은 너그러이 도공들을 묘대천에 그냥 살도록 했다는 것이다.
한편 도진의홍은 녹아도 성하정에 살고있던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성하정 한구석을 떼어주어 고려정이라고 부르게 하고 이곳에 모여 살게 한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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