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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학점 인플레' 손보랬더니 … 강제로 '학점 다이어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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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재학생 여러분, ‘성적평가 시행세칙’ 개정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지난해 12월 12일 기말고사 기간이던 한성대의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글이 올라왔다. ‘성적평가에 따른 시행세칙 변경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신민철 교무처장이 쓴 것이었다. A학점 비율을 30%에서 20%로, 수강인원이 14명 이하인 수업을 절대평가에서 상대평가로 바꾼다는 내용이었다. 시행 시점은 2013년 2학기부터였다. 기말시험만 남은 상황에서 나온 갑작스러운 발표에 학생들은 반발했다. “당초 수업계획서에 A학점 비율이 30%라 수강신청했는데 이제 와 바꾼다는 게 말이 되느냐” “이런 중요한 내용을 자유게시판을 통해 슬쩍 알리는 건 부당하다 못해 치사하다”는 비판적 댓글이 쏟아졌다. 신 처장은 “교육부의 구조조정 칼바람에 평가지표 개선이 시급하다”고 해명했다. 이어 “사전에 충분히 알리고 시행해야 하지만 당장 올해 평가에 지난해 학점관리 부분이 반영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고 했다. 결국 한성대는 바뀐 규정을 적용해 성적을 처리했다. 재학생 정모(22)씨는 “우리 학교는 지난해 평균 A학점 이상 졸업생 비율이 10%로 서울시내 48개 대학 중 45위”라며 “교육부 평가라는 명분으로 대학이 마른 수건을 쥐어짜는 셈”이라고 말했다.

 교육부의 학점 관리 강화 정책에 맞춰 일부 대학에서 ‘학점 다이어트’에 나서자 학생들이 반발하고 있다. 전남대 총학생회는 지난달 11일 학칙 개정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학교가 재수강은 C+ 이하만 가능하고 재수강 성적은 최대 A0까지만 받을 수 있게 학칙을 개정해서다. 학생회는 “학생 의견을 배제한 채 대학이 독단적으로 학칙을 개정하고도 홈페이지에만 공지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학교 측은 “학점관리 평가에서 국·공립대 중 최하위권이라 대책 마련이 불가피했다”며 “교내 전 기관의 의견을 수렴한 뒤 평의원회 심의 등을 거쳐 학칙을 변경한 만큼 문제는 없다”고 밝혔다.

 건국대에선 지난해 11월 나쁜 성적을 받은 과목을 없앨 수 있는 취득학점포기제 신청 범위를 2014년 1학기부터 제한한다고 발표했다 1년 유예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학생들이 “재수강 제도가 없어 학점을 올릴 거의 유일한 기회인 학점포기제를 사전 공지 없이 변경했다”며 반발했기 때문이다. 건국대 부동산학과 김모(29)씨는 “학점기준이 엄격해져 장학금 받기도 어렵고 취업에서 불리할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수도권 한 사립대 보직교수는 다른 교수들에게 “2012년 학점 관련 교육부 평가가 안 좋았으니 이번 학기에 최대 10%까지를 D이하로 학점을 주라”고 강제성 권고를 했다. 이 학교 학칙엔 A학점 비율만 30% 이내고 나머지 학점 비율은 정해져 있지 않다. 익명을 요구한 국제학부 한 교수는 “많은 교수가 학칙에 없는 D·F학점을 일부러 주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반발했지만 재계약 등으로 대학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일부 교수들은 난감해했다”고 말했다.

 대학들의 이런 움직임은 교육부의 학사관리 평가 때문이다. 대학의 ‘학점 부풀리기’ 관행은 그동안 많은 지적을 받아왔다. 학생들이 취업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점수를 잘 주다 보니 변별력이 떨어져 기업들이 학점을 불신한다는 비판이었다. 교육부는 학점 부풀리기 근절을 위해 올해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 평가에 ‘학사관리(성적처리)’ 지표 반영비율을 지난해 10%에서 올해 12.5%로 늘렸다. 학자금대출제한대학 평가에서도 5%에서 10%로 올렸다. 교육부는 학사관리, 취업률 등 8~10가지 지표로 대학을 평가한다. 평가점수가 낮으면 정부재정지원제한·학자금대출제한대학, 경영부실대학에 선정된다. 재정지원제한대학은 정부·지방자치단체의 재정지원사업에 참여할 수 없다. 경영부실대학은 상황에 따라 대학 간 통·폐합, 입학정원 감축까지 해야 한다.

 학사관리 지표에서 50%나 차지하는 ‘학점관리’ 점수는 A~C학점을 받은 학생 비율이 높을수록 깎인다. 대학들이 D·F학점 비율을 높이려는 이유다. 한 사립대 관계자는 “재정이 빠듯한 지방대나 중소 사립대는 교육부 평가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려대 권대봉(교육학) 교수는 “학생들의 반발엔 취업난으로 인한 불안감이 투영돼 있다”며 “학점 부풀리기는 사라져야 하나 충분한 의견 조율 없이 학기 중에 갑자기 규정을 바꾸는 건 지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호·고석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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