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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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경주 서봉총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1926년 10월에 발굴된 것으로 적석목곽식의 구조를 한 것이다.
이 속에서 출토된 봉황무늬의 순금제 금관은 금관 총출토의 금관보다 더 우수한 것이었다.
높이35㎝에 직경18㎝, 그리고 구옥이 57개나 달려 있는 이외에도 영롱한 옥과 유리구슬도 달려 있어 얼마 전까지 가장 아름다운 금관으로 알려졌었다.
이 밖에도 서봉총에서 출토된 보물은 많았다. 파리배라는 유리잔, 청동제 초두, 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 은제 그릇들 모두가 옛 신라의 영화를 자랑하는 것들이었다.
이 서봉총은 당시의 「스웨덴」 황태자이던 「구스타프·아돌프」공의 경주 방문을 기념하여 발굴된 것이었다.
이미 그때 「구스타프」 황태자는 착실한 고고학도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가 그 당시만해도 관광지도 아닌 경주를 굳이 찾아간 것도 그의 뛰어난 고고학적 관심을 보여준 것이었다.
자기를 위해 발굴한 고분 속에서 찬연한 금관이 나왔을 때 그는 얼마나 감격했겠는지 아마 그것은 고고학자가 아니면 또 짐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서봉총의 「서」는 서전(스웨덴)에서 딴 이름이었다 더욱 그는 고마웠을 것이다.
옛날 왕자들의 열매는 주로 사냥 따위의 「스포츠」였다. 그리고 가장 규모가 큰 게 전쟁이었다고 비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학구적인 취미를 가졌던 통치자들도 적지도 않다. 영국의 「찰스」2세는 왕궁 안에 과학 실험실을 두고 몸소 여러 가지 실험을 즐겼다.
「조지」3세는 또 『농부 조지』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농업에 있어서의 개량에 힘을 썼다.
「이집트」원정 때 3백 명 가까운 학자들을 데리고 갔던 「나폴레옹」의 고고학적 관심은 너무나도 유명한 얘기다.
이밖에도 18세기의 이른바 계몽적 전제군주들의 과학열도 당시의 국력배양에 큰 힘이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군주들의 취미는 퍽 다양하다.
동경의 「사가미」만을 중심으로 한 일본 천황 유인의 해조학 연구실적도 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군주란 보통 사람들이 부러워할 조건들을 많이 갖고 있다. 우선 연구나 조사에 필요한 재정적인 뒷받침에 대한 걱정이 없는 것이다.
인적 동원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다. 시간도 많다. 특히 현대의 군주들에게는 그렇다. 옛 군주들은 직접 정치를 했다. 따라서 국무에 시달려 학문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 연구를 위한 충분한 학문적 소양도 없었다.
현대의 군주는 다르다. 그러면서도 학문을 즐기는 군주는 드물다. 「스웨덴」왕처럼 반세기전에 있던 경주의 고분 발굴이 안겨 준 감격을 못내 잊지 못할 만한 군주는 더욱 드물다. 병중의 「구스타프」 왕의 쾌유가 있기를 멀리서나마 기원하는 마음 간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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