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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지표 좋아져도 주부 주름살 깊어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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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신한은행 인사부는 연말연시를 정신없이 보내는 중이다. 지난해 12월 16일 시작된 시간선택제 일자리 채용 때문이다. 200명 채용하기로 했는데 하루에 수백 명씩 문의를 한다. 출산과 육아로 직장을 관둬야 했던 30~40대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마감일인 오는 9일이면 2만 명을 넘겨 세 자릿수 경쟁률을 보일 전망이다. 이 은행의 시간선택제 일자리는 창구 텔러로 하루 4시간 일하고 한 달에 150만원가량을 받는다. 2일 지원한 주부 김모(36)씨는 “남편 월급에만 기대 살기엔 살림이 너무 팍팍하다”며 “꼭 합격해 나 자신과 가족에게 새해 첫 선물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세상의 중심은 나와 가족이다. 나라가 커지고 경제가 잘된다 해도 내가 느낄 수 없으면 말짱 헛일이다. 그중에서도 월급이 늘고 일자리가 안정되는 게 핵심이다. 그래야 나라 경제도 잘된다. 개인이 미래를 낙관해야 소비가 늘고 내수가 커진다.

 이런 선순환을 정부는 올해 기대한다. 현오석 경제부총리는 지난 연말 “시장 골목골목이 손님으로 붐비고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으며 장바구니를 든 주부들의 마음이 가벼워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씨 같은 사람이 많아져 내수가 살아나고, 수출과 함께 쌍끌이 회복을 이끌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표는 어느 정도 기대를 충족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외 기관들은 민간소비 증가율(지난해 1.9%→올해 3% 중후반)과 새 일자리(38만 개→41만~45만 개) 모두 낙관적으로 내다본다. 대법원의 통상임금 판결과 정년 연장, 근로시간 감축과 같은 정부 정책도 근로자에게 우호적으로 작용하리란 분석도 있다.

괜찮은 일자리 늘기 쉽지 않은 구조

 하지만 체감은 수치에 못 미칠 듯하다. 일자리의 질 때문이다. 늘어나는 일자리는 50대 이상 고연령자와 서비스업에 집중돼 있다. 탄탄한 제조업에 바탕을 둔 양질의 일자리가 늘기 쉽지 않다. 국내 취업자 중 제조업에서 일하는 사람의 비중은 100명당 17명꼴이다. 세계 최고의 산업국가인 독일이 22명, 일본이 18명이다. 금재호 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수년간 국내 대표기업들의 매출이 급증했지만 근로자 수는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며 “제조업 비중이 어느 정도 한계에 달했고 해외 생산을 늘리는 경향도 지속돼 양질의 일자리가 크게 늘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수출 온기 안 전해져 체감경기 꽁꽁

 그나마 취업자를 흡수하고 있는 서비스업 생산성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서비스업의 1인당 부가가치 생산액은 2004년 제조업의 65%에서 지난해 44.5%가 됐다. 괜찮은 일자리와 그렇지 못한 일자리 사이의 간극이 줄어들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정년 연장과 통상임금 같은 변수가 대기업이 신규 채용을 꺼리게 하는 악재로 작용하리란 지적도 나온다. 정부 전망치(45만 개)에도 의문이 제기된다. 지난해 새 일자리의 3분의 1가량이 정부의 복지지출에 힘입은 보건복지 분야에서 생겼다. 어린이집 종사자와 간병인 같은 직업이다. 익명을 원한 한 고용 전문가는 “이들 분야의 충원이 어느 정도 끝났고 새 자리를 만들 예산도 넉넉지 않아 40만 개 이상의 일자리 창출은 어려워 보인다”고 지적했다.

 높아진 소비증가율을 길거리에서 체감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수출이 아궁이를 달궈도 윗목에선 온기가 느껴지지 않은 게 오래 됐다. 기업이 돈을 벌어도 월급쟁이와 자영업자의 지갑이 두툼해지질 않는다. 국민소득에서 근로소득자와 자영업자의 몫은 2000년 88.3%에서 2012년 78.3%로 감소했다. 파이가 커지는 속도가 떨어지는데 ‘내 몫’까지 줄다 보니 소비가 위축됐다. 세금 등을 내고 실제로 쓸 수 있는 돈(가처분소득)에서 실제로 소비하는 돈의 비율도 같은 기간 동안 비슷한 폭으로 떨어졌다.

“가계 빚 이자 연 50조, 소비 발목”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동향분석팀장은 “급격한 고령화와 불어난 가계부채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다”며 “수출이 내수로 연결되지 않는데 월급쟁이마저 돈을 못 쓰니 동네 수퍼와 같은 자영업자가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말했다. 변양규 한국경제연구원 거시정책연구실장은 “빚을 갚기 위해 가계가 부담해야 하는 이자만 1년에 50조원에 달한다”며 “올부터 금리가 오를 가능성이 커 가계소득이 늘어도 빚 갚느라 소비할 여력이 없어 보인다”고 내다봤다. 갈수록 오르는 전셋값과 세금·준조세 부담도 내수의 발목을 잡고 있다.

 전문가들은 경제 활성화와 경제민주화를 균형 있게 추진하고 시장을 통해 효율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금재호 위원은 “지난해 완성차업체가 하청 부품업체의 판로를 풀어주면서 수출이 크게 늘고 수만 개의 일자리가 생겼다”며 “기업과 노동 양쪽의 비효율을 허물어야 양질의 일자리가 많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연세대 성태윤(경제학) 교수는 “기업에 투자를 늘리라고 강요하는 방식으로는 실물경기 회복이 어렵다”며 “체감경기를 얼어붙게 만드는 부동산 경기를 정상화시켜 소비를 살아나게 하고, 서비스 부문 규제를 풀어 생산성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현철·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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