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제2화 왕인 박사의 직손 아도 홍문씨(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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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취재「팀」의 다음 발길은 동과 서로, 또 남으로 바삐 뛰게 되었다.
현재 일본의 지도층 인사 가운데 스스로 한국계「귀화인」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몇 분을 산 역사의 증인으로 등장시키기 위해서이다.

<자긍 높은 세 귀화인 후예>
경도의 아도홍문씨, 동경 근교 고려촌의 고려징웅씨, 그리고 구주남단 녹아도의 심수관씨 등 세 분을 우선 만나기로 했다.
이들은 이른바 「귀화인」문제에 대해 과연 어떤 생각을 가졌는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아또 히로부미」(아도홍문·65)옹은 스스로 백제의 후손 왕인 박사의 직손이라고 말하는 일본 귀족출신의 신학자이다. 고색이 창연하지만 썩 잘 가꾸어진 정원을 가진 그의 저택(경도시 중경구 양체정통)에는 나량시대에 제작됐다는 목각의 왕인 신상을 모신 사당이 마련돼 있고, 그 앞엔 그가 사시사철 다례 때마다 사용한다는 한국산 향로와 축문상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가랑비 뿌리는 5월말 어느 저녁 무렵이다. 대판금강학원(대판한국학교)의 노 일본인 교사 복정씨를 앞세우고 용케도 이 집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백발이 성성하지만 아직도 기력이 정정해 보이는 귀골의 노신사였다. 그는 이미 기자의 내방을 조상님의 계시로도 알고 있었다면서 손을 잡아끌듯 반겨주었다. 대판금강학원 이영훈 교장의 사전연락 덕분도 있었지만, 그가 이렇게 낮선 손을 반겨준 데에는 그럴만한 특별한 사연이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아도옹은 좌정하자마자, 사당 앞에 놓인 홍매 화분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문을 열었다.
『선생은 일본의 「미와야마」신화(삼륜산신화=나량현 앵정시 근처 삼륜산을 중심으로 전승돼 내려온 일본 건국신화의 하나)에 관해 상당히 많이 알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저 홍매꽃 화분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하실 겁니다.』
『글쎄요. 여기 오기 전, 몇 가지 문헌을 읽기는 했습니다만, 저 꽃과 저의 방문과 무슨 특별한 관계라도 있다는 말씀이신 가요.』
『있고 말고요, 있읍지요. 아시다시피 저의 조상이신 왕인씨 일족이 한반도에서 일본에 건너올 때 가져온 꽃이 바로 매화였습니다. 「미와야마」신화에 자주 나오는 꽃도 매화가 아닙니까.

<삼륜산신화의 꽃 매화>
저기 저 화분은 잘 아시는 대판왕인공원(대판부매방시 등판 소재·왕인 묘가 있는 곳)에 핀 매화나무 가지를 얻어다 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처럼 저에게 특별히 반가운 손이 들기라도 할 때에는 겨울에도 활짝 꽃이 피고 꿈에는 조상님의 영이 나타나서 미리 알려 주십니다.』
얼른 곧이듣기 힘든 얘기 같았지만 이 노인이 말하는 얘기가 반드시 겉치레 인사나 과장만은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수긍이 간다. 매년 3월 5일, 그는 일본 전국의 귀빈들을 모셔 놓고 자기 집에서 『기부도 박사 왕인사의 홍매행사』까지 베푼다는 얘기를 미리 알고 왔기 때문이다. 우연히 입수하게 된 것이지만, 그가 일본 궁내청 시종 모씨에게 낸 이 행사의 안내장 문면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어애찰(인사말씀)…저희 가문에 전해져 내려온 유학은 박사 왕인의 학통을 이은 것입니다. 따라서 옛날 저희 집에서 홍법대사(주=일본 진언종의 개조·774∼835)가 배웠다고 하는 유학도 박사 왕인의 학통 이었습니다.…저희 집안은 지금도 그 혈통을 계승 하고있는 가문입니다. 오는 3월 5일 기부도 박사 왕인사의 홍매행사에서는 우극선사 친필의 찬문(讚文)이 있는 도경천신(왕인)상을 보여드릴 것입니다. (중략)
그날은 특히 궁중어학문소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 중, 효명천황께서 명치천황의 황태자 교육에 관하여 친필로 내리신 서한(신한)도 전시하기로 했습니다.…이 친필서한은 저희 집안 홍매행사 때에만 전시가 허락되는 것입니다. 아도홍문 경백】

<일본 상고사의 파노라마>
다시 말해, 이 집안에서는 대대로 이 홍매를 조상이 가져온 꽃이라 하여 숭상해 왔으며, 매년 상매행사를 벌일 만큼 매화꽃에 특별한 의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조장 왕인 박사의 내력에 관해서도 많은 고증을 통해 거의 신앙적 믿음을 가진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앞서도 잠깐 말한 것과 같이 일본황실과도 혈맥이 닿는 귀족출신이고, 학벌도 뚜렷한 이른바「신도」의 이론가이다. 받아든 명함에 적힌 <대화국일지궁 삼륜사신도종가·진언종종노 아도가당주>라는 직함으로도 대충 짐작이 가지만, 그와의 대화를 통해 얻어들은 『백제에서 건너간 박사 왕인』에 관한 설화의 내용은 어느 정도 납득이 갈 수 있는 얘기들이다. 실상 백제에서 일본에 건너갔다는 왕인 박사의 얘기는 어쩌면 일본에서만 유명한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가장 오래된 역사책의 하나라 하는 『고사기』 및『일본서기』(줄여서『기기』라 한다)에는 백제의 임금 초고왕(또는 근초대왕)이 일황 응신제의 청을 받고, 그 자손 중에서 「와니」(왕인 이라고도 「화이」라고도 표기돼 있다)박사를 보내 일본 황태자의 스승으로 삼게 했는데 그는 그때(응신 16년·서기 285)『논어』10권과 『천자문』 1권 등을 가져가 처음으로 일본에 전했다고 기록돼 있다.

<왕인 박사 설화의 허실>
그러나 이러한 얘기의 사실여부에 대해서는『기·기』에 쓰여진 기록의 내용자체에 엉터리 기술이 많을 뿐더러 특히 그때 왕인 박사가 『천자문』을 전했다는 얘기는 민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천자문』은 그로부터 3백년이나 뒤인 중국 양나라 무제(재위 502∼549)때 주흥사가 편찬한 책이라는 게 정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기』등에 나오는 왕인 설화는 다음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 보면 틀림없을 것도 같다. 즉 중국의 가장 오래된 사서『한서지리지』(1세기께 반고찬), 『위지왜인부』(3세기말 진수찬)을 비롯하여 그 밖의 일본사료『신찬성씨 록』(9세기초 일본 우다친왕찬), 『제기』(6세기후반 한국계 일인사관의 찬) 등에 보이는 기록들을 함께 종합 검토할 때, 적어도 「와니」라는 이름의 씨족이 존재했고, 또 그들이 일본사회의 정치적·종교적 지배세력으로서 군림했다는 사실을 각색한 것이라 보면 틀림없다는 것이다(산미행구저 『위지왜인부』및 상전정소저『귀화인』참조).
아도씨가 말하는 그의 조상 왕인 박사의 내력 역시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한인 호족끼리 쿠데타>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조상 왕인씨 일족은 일본의「야마또」조정이 생기기 훨씬 이전 한반도에서「이즈모」(출운)지방 (현 도근현 산운시 부근)을 거쳐 일본에 건너와 2세기께 에는 이미「야마또」지방, 즉 지금의 대판·경도·나량지방 전부를 포함한 근기지방 일대를 장악한 호족이자 지배세력이었습니다.
이때 왕인씨족의 족장은 별(성신)의 운행에 의하여 길흉을 점치고, 음양의 순리에 따라 주민을 다스리던「샤먼」(무당=「미꼬」)이었고, 그 근거지는 지금의 나량현 앵정시 근교의 「미와야마」(삼륜산)기슭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불교를 믿게된 또 하나의 한반도 도래 집단이 이 지역에 이른바 「야마또」를 세우는 과정에서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지요….』
그는『일종의「쿠데타」』라는 말을 하면서 얼굴에 홍조를 띠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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