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페론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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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환·도밍고·페론을 중남미 특유의 카우딜리요 형 독재자라고 말한다. 카우딜리요(Caudillo)는 스페인어로 수장·두목·지도자라는 뜻.
카우딜리요는 뛰어난 자기 현시적 본능을 갖는다. 또 정치가로서의 의무수행을 위해 생명을 걸고 두려움 없이 의사 표시를 한다. 그는 영웅주의를 신봉하며 웅변으로 자기를 자랑하려고 한다. 국민적 매력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페론은 살지니아 계 이민의 아들로 l895년 아르헨티나의 붸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의 경력은 그렇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17세에 국립육사에 입학. 21세 땐 중위의 신분으로 군의 관료주의를 비판, 군법에서 처벌을 받은 일도 있다. 육군대학에선 전사와 전략을 강의.
정치에의 관심은 이탈리아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관의 육군무관을 지내면서 깊어졌다. 그는 로마에서 파시즘의 세례를 받아 뭇솔리니의 정치적 연기를 몸에 익혔다.
1941년 귀국. 페론은 50인의 정치장교를 규합해서 통일장교단(GOU)을 만들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두문자인 GOU(Group of Official Unidos)를 정치(Goverment)·질서(Order)·통일(Unity)로 상징화해서 카스틸리요 대통령의 정권을 무너뜨렸다. 새 정권수반으로 라미레스를 들어 앉혔으나, 그는 통일 장교단의 세력이 점점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이들을 탄압했다. 이 때 페론이 역 쿠데타를 일으켜 실력자가 되었다.
페론은 실력자이면서도 인기가 없는 각료 직인 노동·사회복지 장관을 자청했다. 그것은 숨은 야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따라서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주고, 단체교섭을 인정하며, 주택계획을 세워 사회 복지를 눈에 띄게 개선했다. 따라서 노동자 계급의 카우딜리요가 된 셈이다.
이것이 기반이 되어 그는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한편 그의 첫째 부인인 에바·두아르체 는 부인 참정권을 확립하고 한편으로 사회 원조단을 만들어 극빈자를 돕는 등 내조의 공을 쌓았다.
그러나 페론의 급진적인 정책들은 달러 부족과 인플레를 초래했다. 2차 대전 중 농축산물을 팔아 모은 14억 달러의 국고외자는 공업화정책과 노동자 우대에 다 써버렸다. 그는 정권유지의 한 수단으로 공업화정책을 밀고 나갔다. 따라서 농 목축에의 재투자를 무시했었다. 페론은 결국 대지주와 군부의 반감을 사서 1955년 권좌에서 추방되었다. 페론이 없는 18 년 동안 아르헨티나는 역시 공업화 일변도에의 집착을 버리지 않았다. 오늘날 자본재의 수입증가에 따라 대외채무는 50억 달러에 이르고, 농업투자에의 의욕이 감퇴했으며, 근간을 이루던 농목 생산은 정체에 빠졌다.
한편 내정도 악순환을 거듭해 비상사태 선언, 계엄령의 곡절을 겪은 바 있었다.
이런 상황은 결국 페론에 대한 노동자들의 향수를 자극, 비바·페론!(페론 만세)의 현실을 몰고 왔었다.
페론 부부는 드디어 그의 그림자 캄포라를 물러앉게 하고, 정·부통령 후보에 나서게 되었다. 제2의 페론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역시 악순환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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