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3)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2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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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구의 평양행>
김구가 서울에 돌아와서 쓴 「한국독립당 북한방문보고서」(당외 비밀문건)에 의하면 김일성의 북한에 있어서의 시책을 축조비난하고 김일성의 북로당과 김구의 한독당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있다.
48년 4월 남북 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가 개최되기 전까지는 김일성 치하의 북한에 있어서 어떠한 이유인지 그들의 욕질인 소위「우익반동분자」로서 김구를 이승만보다 제일의 적으로 지목하여 『우익 반동분자 김구·이승만을 타도하자!』라는 「비라」가 도처에 붙여져 있었다. 생각건대 그것은 아마 평양의 민족진영의 거두 조만식과 김구가 직접 연결을 가지고 그들의 공작원이 서울∼평양간을 왕래하면서 김일성 타도공작을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김일성도 제일의 타도 목표를 이승만보다도 김구에 둔 것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김구가 「연석회의」로 북한에 오게되니 하룻밤사이에 『우익반동분자 김구·이승만을 타도하자!』는 「비라」가운데서 김구의 이름이 지워졌다.
그뿐 아니라 천진 난만한 소학생까지 동원하여 그들로 하여금 김구 옆을 지나가면서 『반동 우익분자 김구가 오늘 온다지』 『응, 김구는 어제까지는 우익 반동분자였지만 오눌 우리 김일성 장군의 부름을 받고 오니까 오늘부터는 애국자야』라고 일부러 김구의 귀에 들리도록 시켰다는 것이다. 김구는 물론 이 말을 듣고 김일성의 이중 성격에 불쾌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남북 연석회의」는 23일 「조선의 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그것뿐만 아니라 26일에는 ㉮현하 조선의 정정 혼란을 야기 시킨 전 책임은 38도선을 고정화하며 남북 분단을 영속화하는 단독선거를 실시하려는 미군정당국에 있다 ㉯어떠한 조건, 어떠한 환경, 어떠한 경우에도 남조선 단독선거는 절대로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3천만 민족의 이름으로써 단호 반대한다 ㉰조선분할에 이용당하고 있는 UN조선위원단을 철수할 것이며 미·소 양군의 즉시 동시 철퇴를 요구한다는 내용의 「미·소 양국 정부에 보내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 요청서」를 채택하였다.
「회의」는 28일에 폐회, 30일 조선정치에 관한 결정과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공동성명의 내용은 ①조선에서 외국 군대를 즉시 동시 철병시키는 것이 현하 정세에 있어서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옮은 유일의 방법이다 ②남북 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들은 조선에서 외국군대를 철퇴시킨 후 내전이 유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선 인민의 희망에 배치하는 어떠한 무질서의 발생도 허용하지 않는다 ③외국 군대의 철퇴 후 전 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최초의 과업으로서 통일조선의 입법기관 선거를 실시하여 그에 의하여 조선 헌법의 제정, 통일적 민주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 공동성명에 서명한 제정당·사회단체는 이남 측에서는 남로당·한국독립당·인민공화당·근로인민당·민족자주연맹 등 28개 정당·사회단체이며 이북 측에서는 북로당·북조선민주당 등 15개 정당·사회단체들이었다.
「남북연석회의」가 남북의, 그리고 좌우의 정치요인의 흉금을 열어 통일을 위한 진지한 회담의 마당이 되지 않고 김일성 측의 일방적인 모략에 이용당하고만 것은 유감 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요망되는 남북연석회의가 열렸으면서도 왜 통일도 되지 않고 통일에 의한 걸음도 디디지 못하고 서로 불신감만 깊게 하고 김구에 있어서는 결국 남북연석회의에 출석한 것이 원인이 되어 목숨까지 잃고 말았으니 결과적으로 봐서는 김구·김규식 등의 전망이 얕았으며 결국 자살 행위에 불과하였었다.
5월 5일, 김구와 김규식은 평양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6일 그들은 남북연석회의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실패라고도 하지 않고 성공이라고도 하지 않고 특히 요령부득의 것이었다.
김일성은 북한에서는 어떠한 형태의 단독 정부라도 수립하지는 않을 것이니 남한에서의 단독정부의 수립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라고 호소하였다. 그는 정말로 북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할 의사가 없었는데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니 할 수 없어서 북한에서도 단독 정부를 수립하였을까. 사실에 있어서는 그런 것이 아니다.
김일성의 추종자이며 공작원이던 이우적은 비밀리에 북한에 다녀와서 47년에 그의 ML파의 동지이던 온낙중의 이름으로 「북조선 기행」이라는 책을 출판하였었다. 그는 그 책에서 김일성의 북한에서의 시책을 극구 칭찬하였으며 김일성이야말로 「영명한 지도자」라는 존칭을 받을 가치가 있는 지도자라고 치켜올렸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우적은 나와 단둘이서 만나서 보고 온 북한의 이야기를 하는 말 가운데 사실은 소련군 정치부에서는 김일성과 북로당보다는 남로당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것 같다. 소련은 김일성 정권의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미·소 공동위원회가 성공하자면 미국이 소련의 요구에 전면적으로 양보를 하여 「반탁」하는 정당과 정객을 전부 제외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미·소 공동위원회를 무슨 구실을 붙여 깨뜨리고 우선 북한만의 단독 정부를 만들어서 김일성의 실력을 양성시켜야 하기 때문에 통일 정부가 수립될 가능성은 퍽 적으니 나에게 남로당을 그만두고 자기가 하는 김일성 직계 조직에 들어오면 유리할 것이라는 「충고」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충고」를 듣지 않고 남로당을 그만두고 그의 「김일성 직계 조직」에는 들어가지 않았었다.
그러면 당시 북쪽의 김일성은 어떠하였는가. 1948년 4월 14일에 남한에서 수립될 단독 정부를 반대하여 평양에서 남북 정당·사회단체를 소집한다하면서 벌써 북한의 단독 정부인 인민공화국 헌법의 초안을 발표하여 대중적 토론에 붙이기 위하여 4월 25일에 소집한 소위 북조선 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헌법 초안을 채택하였던 것이었다.
남북연석회의는 결국 북한에서 단독정부수립을 가리우는 연막으로 이용하였던 것이었다. 김일성이 무엇을 하자고 제의하여 올 때에는 특별히 주의하여야할 것인데 그에 대한 연구와 대책도 세우지 않고 응한 사람은 반드시 실패하여 멸망하고 말 것이다.
김규식은 동란 때 김일성을 믿고 서울서 피난도 가지 않고 있다가 이북으로 잡혀가서 만포진 가까운 외기리에서 별세하였는데 김일성의 「정부」와 북로당에서는 간부한사람 문상하러온 사람도 없었다. 한사람의 문상객도 없이 눈에 얼어붙은 압록강가의 벽지에 개 무덤보다 못하게 파묻히고 말았다. <제자 박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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