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과의 공감대 형성|신경림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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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시를 쓸 때 시인이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말은 때로 매우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 시인의 반속적 자세에 대한 당위론적 확인으로 간주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말 속에서 상당한 속임수가 개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가 없다.
가령 이러한 유의 시, 대표적 경우인 난해 시를 예로 들어볼 때 우리는 매우 흥미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이야말로 부정적인 측면에 있어 가장 적극적으로 독자를 의식하면서 시를 쓰는 부류임을 알 수 있는 까닭이다.
이를테면 이들이 스스로도 알 듯 모를 듯한 시를 써 놓고는, 그 앞에서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를 찾아내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독자를 머리에 떠올리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이들 시 앞에 독자가 마침내 손을 들어 서로의 사이 「갭」이 인정될 때 그곳에는 이들이 지적 우월감과 전문가적 오만을 만끽할 수 있는 안전대가 형성되며, 독자는 이들의 처세주의를 위해 봉사하는 꼴이 된다.
결국 이들의 처세주의적 입장은 이들로 하여금 더욱 기발하고 난해한 언어를 개발 조립, 독자 앞에 전시하게 함으로써 독자를 의식하지 않으면서 시를 쓴다는 이들의 호언이 한갓 독자를 더 단수 높게 의식하며 지어 보인 「포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일깨워 주는 터이다. 이는 난해시의 사회적 예술적 무의의성 및 독소성에 대한 또 다른 측면에 있어서의 확인이 되기에 족한 것으로서 여기서 이들이 독자를 의식한다는 것은 「에고이즘」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도 아울러 간파되어야 할 것이다.
대개 독자를 의식하면서 시를 쓴다고 하면 그것이 곧 독자에 대한 영합으로 착각되기가 첩경이지만 이러한 착각 자체가 본질적으로는 천박한 견해, 예컨대 우민 사상 등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특히 그것이 민중과의 공감대의 형성이라는 내포적 개념으로 좁혀질 때의 그것은 더욱 분명해 진다.
더구나 일반 민중을 결합시키고 승화시킨다는 문학의 원초적 기능은 어떠한 현학적 이론에 의해서도 결코 부정되거나 경시될 수 없는바 반속적 자세가 반드시 장땡일 수 없고 독자를 의식하면서 시를 쓴다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주장은 오히려 새삼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경우 시인의 얄팍한 출세주의적 현실주의적 「에고이즘」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우리는 이를 경계하고 타기 해야 함은 물론이다.
박재삼씨의 『신록을 보며』의 4편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서 우리는 대자연의 경이 앞에 선 한 인간의 무려 함을 보게된다.
이 시인에게 있어 이 무력함은 좌절로 이어지는 대신 기쁨과 황홀의 원천이 되고 있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가><아 나는 무엇을 이길 수가 있는가> (『신록을 보며』) 하고 그는 신록 앞에 서서 기쁨의 절정에서 외치는 것이지만 애초부터 그에게는 좌절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자연은 인간과의 대치 개념도 상대 개념도 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이 자연의 일부일 따름인 것이다.
따라서 <산하고 물하고 밖에는 그릴 수가 없었던 산수화가는 차라리 새 소리는 구슬로 신령한테 바쳐버리고><아지랑이 화필로 멍한 귀머거리 산수를 대할 수밖에> (『한 산수화가』) 없는데 이 시인의 시적 완성의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이 시인에게 이 이장의 것을 기대할 것도 요구할 것도 없다. 맑은 냇물을 들여다 보듯 찬란하게 반짝이는 시어로 엮어 긴 세계를 보는 것만도 적잖은 기쁨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전시 편에 짙게 깔려있는 반문명주의적 색채가 참다운 민중감정의 그것으로 혼동 파악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인태성씨의 『어제·오늘』 (문학 사상)은 소시민적 불안과 회의, 일상적 뉘우침과 권태에 시종 강렬하게 지배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정한 혼돈을 거친 뒤의 지혜를 엿보이게 함으로써 자못 밝고 젊은 「톤」이 유지되고 있다. <흙 묻은 발로 어정댄다. 발자국, 발자국을 수 없이 어지럽게 찍으면서. 뛴다. 달린다. 큰 대자로 사지를 벌리고 눕는다. 그러나 기껏 맴돌아, 그냥 그대로 가득 빈 백지 한 장의 영역.> 우리의 일상 생활을 지배하는 것이 대 사건만은 아니며 또한 우리를 멸망으로 이끄는 것이 파국만은 아니 요,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조금씩 조금씩 우리를 좀 먹어가고 있는 시간이라는 것은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닌 터이지만 인태성씨의 이 시는 다시금 이를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이것이 소시민적 차원에서 다루어진 점에 있어 아직도 우리에게는 불만으로 남는다.
이가림씨의 『땅 뺏기』 (신동아)는 이러한 어린 시절을 가졌던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쉽게 공감되는 시이다. 가난하고 메마른, 그러면서도 정다운 시골의 어느 일각도 잘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의 공감은 지나치게 향수에만 의존되어 있는 감이 짙다. 그것이 문 면에 나타나 있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또 그래서도 안되겠지만 이러한 유의 시가 역사의식 또는 비판 의식이라는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을 때 그 의미가 반감된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지금 내 귓가에 돌아오는 소리여 쇤 삘기 같은 계집애들 나부껴 깡마른 노래의 고무줄이나 넘고 있는 동구 밖>등 밝고 경쾌한 사상은 강력한 호소력을 동반하지 않는 대신 이 시를 무리 없고 안정된 것으로 만들어 주고있다.
그와는 대조적인 입장에서 논의될 수 있는 것이 김창범씨의 『창포 꽃』외 5편 (창작과 비평 여름호)이다.
그의 목소리는 굵고 드높다. 한편의 시속에서의 내부적 모순이나 충돌도 눈에 두드러진다. 의식의 과잉된 노출도 언젠가는 청산 극복돼야할 과제로 남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시인이 지닌 긴한 호소력을 외면할 수 없게 된다. 좀더 다듬고 닦아야할 바 적지 않음을 알면서도 우리가 이 시인을 좋은 자질의 시인으로 인정하는 데서 숨지 않은 것은 바로 여기에 까닭이 있다.
배미순씨의 『전생』 (월간 중앙)은 소박한 「리리시즘」의 시이다. 죽은 아기에 대한 설움이 아무런 기교도 없이 서술되어있다. <돌아서면서 내 눈물은 밤마다 빈 하늘 헤매는 착한 혼이 되었습니다만>일면 신비주의적인 경향도 없지 않으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설움을 부각시키기 위한 상식적인 차원에서의 접근에 지나지 않는다. 설움이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는 것이 이 시의 내용이 간격없이 밀착해 있어 이 시인의 앞날을 기대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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