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휴전회담(후반부)(7)|이 대통령의 항거(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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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이젠하워」행정부는 1953년 5월25일 공산 측에 제출할 새 제안을 마련하는데 있어 철저한 비밀의 장막을 쳤다. 제안 골자는 휴전과 함께 석방하려면 송환 반대 한국인 포로들도 중국인 포로와 마찬가지로 중립국 송환 위원회에 넘겨 운명을 결정케 한다는 것이었다. 공산 측 주장을 받아들인 중대한 양보였지만 미국은 이 안으로 포로 문제가 채결되지 않으면 아예 회담을 결렬시키고 새로운 군사적 수만으로 한국전쟁을 끝장내려고 결심하고 있었다. 이 점을「워싱턴」은 미리 제3국을 통해「모스크바」와 북 평에 각각 전달했다.
미국은 휴전 결사 반대를 부르짖고 있는 한국 정부가 행여나 이 새 제안을 눈치챌까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 대통령에게조차도 실제로 제출 1시간 전에 제안 내용이 통고 됐고 휴전 회담 한국 측 최덕신 대표에게는 제출 직전의 참모 회의에서 알리는 등 만등 하였다.

<아이크 친서를 이 박사에 설명>
미국은「클라크」사령관과「브릭스」주한 미 대사를 시켜 이 대통령에게 이 제안을 알리면서 휴전에 동의하는 대가로「워싱턴」이 제공할 군경 원조 내용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아이크」의 친서까지 가지고 온「클라크」·「브릭스」의 설득을 즉석에서 물리쳤다.
이때의 경위는「클라크」장군 저『「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브릭스」대사와 나는 이 대통령에게 우리의 최종적인 태도를 설명하고 만약 한국이 휴전에 동의한다면 미국이 베풀 군사 및 경제 원조의 내용을 개설한「아이젠하워」대통령으로부터의 개인 친서를 전달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우리들은「해리슨」중장이 판문점에서 「유엔」군 측의 새 제안을 수교하기 1시간 전인 상오10시에 경무대에 도착했다. 우리 도착 시간은「워싱턴」에서 미리 정해 놓은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변영태 외무장관과 함께 있었다. 대통령에 잘 보이려고 그런지 변 장관은 휴전 문제에 있어서는 항상 국가원수 보다 한술 더 떠서 우리를 비난하곤 하였다.
「브릭스」대사는 정치 및 경제면을, 그러고 나는 군사 면을 각각 담당하여 서한 사본을 보며 설명하였다. 우리가 대통령에게 제안한 것은 공산 측이 휴전협정을 위반한다면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싸운 16개 국가가 이에 대항한다는 것을 공동으로 성명 한다는 것이었다. 제안 된 이 정책 성명에는 공산 측이 휴전협정을 위반했을 때 받게 될 보복 행위는 한국 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중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 단독으로는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확충하고 이에 상부한 해·공 군사력도 갖게 한다는 것을 약속하였다. 이것은 대단히 큰 약속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왜냐 하면 한국군 1개 사단을 신설, 유지하려면 연간 1억5천만불 내지 2억불이 들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또한 이 대통령에게 최소한 10억불의 경제 부흥 원조를 약속하고 확고한 평화가 깃들일 때까지 미군은 한국 안에 머무른다는 보장도 주었다. 그 대가로서 우리는 이 대통령에게 휴전 반대운동을 자제하고 일단 조인되면 휴전협정을 지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는 한국군을 계속 「유엔」군사령부 휘하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우리 설명을 듣고 있던 이 대통령은 분격하였다.

<우리 운명 스스로 결정하겠다>
그는 의자에 똑바른 자세로 앉아 한국 독립 운동 초기에 고문을. 받았다고 내가 들은바 있는 손가락 끝을 부 벼 대고 있었다. 얼굴 근육도 몹시 씰룩 거였다. 우리의 계획과 약속을 반복 설명하는 도중에 그는 우리 말문을 막으면서 「나는 대단히 실망하고 있소, 당신 네 정부는 자주 태도를 바꾸고 한국 정부 뜻을 무시하고 있소」라고 말하였다. 그는 계속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가 계속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중공군을 우리 국토 밖으로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오.
그것 없이 평화적 해결이란 있을 수 없소, 당신들의 위협은 나에게 아무 효과도 미치지 못하오, 우리는 살기를 바라오, 우리는 우리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겠소. 좀 안되었지만 나는 이런 형편에서는「아이젠하워」대통령에게 협조하겠다는 보장을 줄 수 없소. 당신 대통령에게 휴전 반대는 내가 선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소원에서 나온 것이라 전해 주시오. 내가 설혹 이 새로운 제안을 받아들이리라고 말해도 국민들이 듣지 않을 것이오.」 나는 이 말은 약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반 한국인들은 아마 휴전협정의 실제 내용을 잘 모르고 있겠지만 전쟁이 끝난 사실은 적지 않게 반가이 여기고 있을 것이다. 변 외무장관은「브릭스」대사와 나에게 송환 반대 한국 포로들을 장기간 공산주의자들과 접근시킨다는 것은 결국 현재 송환과 다를 게 없다고 경고하였다. 이어 그는 그렇게 되면 많은 포로가 자살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사실 나중에 일부는 자기 목숨을 끊었다. 이 대통령은 한 명의 인도 군도 한국 안에 내려놓지 않게 하겠다는 것을「아이젠하워」대통령에게 전해 달라고도 했다.「우리는 이상 더 지체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소」라고 그는 말하였다.「만약 미국이 세계 민주주의를 구하려고 한다면 지금 그렇게 해야 하오. 세계의 반공 주의자들과 민주주의적 국민을 파멸의 길로 몰아넣지 않기를 바라오. 세계는 위대한 지도 이념을 추구하고 있소. 약해서는 안 됩니다. 뒤로 돌아서지 마시오. 민주주의는 뒷걸음 쳐서는 안 됩니다. 어느 때고 미국이 홀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될 날이 올 것이오. 그날을 앉아서 기다리지 마시오.」
「브릭스」대사와 나는 이 노 대통령의 웅변을 경청하면서 한편으로는 최선을 다해 설득하려고 진땀을 흘렸다. 그러나 나 자신 개인적으로 말한다면 이 대통령 견해의 대부분에 동의하고 있었고, 미국을 위한 가장 현명한 장기적 노선은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을 군사적으로 패배시키는 길뿐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두 시간 회담의 끝머리에 가서 감정 어린 엄숙한 목소리로 이렇게 끝을 맺었다.
「우리는 수락할 수 없소, 그것은 우리 국민의 의사와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오, 당신 네 대통령에게 필요한 경우에는 우리 한인들 혼자 싸우도록 해 달라고 말씀해 주시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이오.」
쟁쟁하게 울린 이 선언이 진의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대한 민국으로서 자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단독으로 전쟁을 싸우는 것이다. 일부 한국 인사들은 한번 싸워 보지도 못한 채 공산주의자들 앞에 굴복한「체코」의 운명을 따르니 보다 자살하는 것이 더 나은 길이라고 말하였다.

<국민 의사에 상반…수락 못 해>
그들은 자살을 통해 한국은 적어도 역사상 위대한 명예를 지닌 국가로서 남을 것이며 한국의 희생은 여타 자유세계에 대한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와「브릭스」 대사가 이 대통령을 만나 뵙고 있는 동안 최덕신 한국 대표는 휴전 회담을「보이 코트」했다.』
이번에는 이때의 최 대표 처지와 심경을 그의 저서『제2의 판문점은 어디로』에서 살펴보겠다.
『1953년 5월25일9시45분, 이 대통령과「클라크」장군의 회담 시간 15분전인 이 시간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잊어서는 안 될 시간이 될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동의 없이 한국인 포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제안을「유엔」군 측이 우리에게 정식으로 강요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유엔」군 측은 우리를 제쳐놓고 우리에게 중대한 관계가 있는 제안을 꾸밀 수는 있지만 그래도 공산 측에 내놓기 직전에는 우리에게 알리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날 참모 회의(주=회담 개최 전에 여는「유엔」군 측 대표들의 회담 작전 회의) 가 열리는 이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공산 측 안 동의에 참을 수 없어>
이런 생각에서 회의장에 들어갔는데 다른 대표 책장 위에는 두툼한 서류들이 놓여 있었으나, 내 책상 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럴 수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하는 수 없었다. 드디어 회의가 시작되자 전에 없이「해리슨」중장은「머피」대령, 오늘 우리가 제출할 제안을 낭독해 주게.」라고 지시했다. 그는 어려운 용어로 된 새 제안을 거침없이 읽어 내려갔다. 아무리 어학의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빨리 읽어 가는 말을 듣기만 하고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든 일이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며 귀를 기울였다.
대부분은 저번에 제출한 안과 비슷했는데 마지막에 가서「한국인 포로는 정전 즉시 석방한다라는「유엔」군 측 5월13일자 제안을 철회한다!」라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는가. 역시 비밀은 이것이었다는 우리와의 약속을 어기고 나에게 함구령까지 내리고 공산 측에 내놓으려는 새 제안이 바로 송환 반대 한국인 포로들을 중립국에 넘겨주겠다는 것이니,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이 제안에 절대 동의할 수 없으니 공산 측에 제출해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그러나「해리슨」중장은 이 제안은 연기할 수도 철회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에 대한 동의는 오늘 10시에「클라크」장군이 직접 이 대통령을 만나서 받을 것이고 오늘 꼭 제출하라는 지시를「워싱턴」에서 받았다는 것이 라고 나는 재차 대통령의 지시를 받을 때까지 이 제안의 제출 연기를 간청했지만「해리슨」중장은 안되겠다는 것이고, 도청의 염려가 있다고 외부와의 전화도 걸지 못한다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더 참을 수 없다. 나는 벌떡 일어나 주먹이 부서져라 하고 책상을 꽝 쳤다.…』

<주요일지> (1953년 3월1일∼4일)
※1일 ▲미 공군, 청진항 맹폭 ▲「이란」의 반「모사데그」의원들 왕정지지 결의안 제출 ※2일 ▲「테일러」8군사령관, 공산군 공세 경고 ▲「이란」정정 소란 ▲「처칠」수상도「스탈린」과의 회담 희망
※3일 ▲미국, 일본에 1억3천만 불 어치 탄약 발주 ▲「밴플리트」전 8군사령관,「아이젠하워」대통령과 회담.
※4일 ▲「스탈린」중태 보도 ▲「클라크」사령관 내한, 이 대통령과 회담 ▲「아이젠하워」대통령,「스탈린」의 회유 희망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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