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성년의 날」…그 의의|청소년의 도덕의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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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I
불과 며칠 전에 우리는 최초의 「성년의 날」을 맞이했다. 만20세가 되는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사회적 기대를 제도적으로 부여한 셈이다. 이들이 보다 발랄하고 창조적인 생활을 누리면서도 보다 책임있는 민주시민으로 성장하도록 기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을 과연 성인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물음은 급변하는 산업사회에서 청소년이라고 불리는 젊은 층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사회가 산업화의 와중에서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급변하게 되면 청소년기간이 길어지게 된다. 따라서 만20세가 된 젊은이는 육체적으로는 비록 성숙했다 하더라도 넓은 의미의 사회적 성숙도는 얕은 것이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성년의 날」을 맞는 젊은이들이 육체적으로 성숙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아직도 피부양적 존재로 미숙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이 격차 이외에 또 다른 격차가 있다. 법적으로는 성인의 취급을 받으면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미숙한 존재로 취급을 받게된다.

<편협·이기적인 기성세대>
이러한 성숙도의 격차에서 오는 여러 가지 욕구불만과 실의를 어떻게 창조적으로 해소시킬 것인가? 현대 젊은이의 고민을 이런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전통사회에서는 이러한 고민을 그때의 젊은이들도 갖고 있었는가? 유가의 전통 밑에 살았던 옛날의 젊은이는 20세에 어른이 되는 성년식인 관례를 하고 30세에 결혼한다는 「예기」의 정신을 인정하였으나, 여말과 이조 초에 와서 조혼경향이 생김에 따라 관례와 성혼을 거의 동시에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육체적으로 미숙했던 존재가 사회적으로는 성숙한 존재로 인정받게 된 셈이다. 오늘날과는 판이한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당시의 인구의 연령별 분류는 소·장·노로 되어있어 현대의 청소년 개념은 부재하였는데 유가의 가르침에 따르면 혈기미정의 소에 해당하는 젊은이는 「계색」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조혼의 경향이 색으로 인한 욕구불만을 제도적으로 해소해주었던 것이다. 이 점 또한 현대의 젊은이와는 아주 달랐던 것이다.
오늘을 사는 젊은이, 특히 사회가 분화되고 전문화되면서 학교에서 배워야하는 학생층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사는 오늘의 젊은이들은 사회적 성인으로 취급받게 되기까지 장기간 미숙한 인간으로 취급받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인의 날이 만20세로 고정된다고 하는데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구미의 경우보다 더 오랫동안 미혼으로 지내야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구미의 젊은이들 보다 더 심각한 욕구불만을 안고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60년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구미의 청소년문화를 장기화한 청소년기에서 나오는 문제로 해석하는 학자가 있는데,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 젊은이들의 문제가 더 심각한 것 같다.

그러면 심각한 문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겠는가? 이 문제를 정확하게 그리고 깊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들의 도덕 의식을 창달하는 방법을 성공적으로 찾아낼 수 없게된다. 이들의 고민을 단지 성욕만족의 지연으로만 볼 수 없다. 오히려 사회·문화적인 차원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로,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거는 기대가 너무 많기 때문에, 폭주하는 기대는 정신적인 짐을 젊은이에게 지워주는데서 젊은이의 고민을 찾아 낼 수 있다. 적극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는 주문보다 『하지 말라』는 주문이 더 많다. 젊은이는 이 같은 명령에 대해서 반발한다. 이것은 권위와 권위의 상징에 대해서 반발하게 한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것은 이러한 반발도 제대로 못하는데서 찾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둘째로, 옛날에는 계층에 따라 젊은이의 고민이 단순했었다. 양반계층의 젊은이는 벼슬하는 것을 지상목표로 했고, 하류계층은 먹고사는 문제에 신경을 썼기 때문에 그들의 고민이 비교적 단순했으나, 오늘의 젊은이는 벼슬도 해야하고, 먹고도 살아야하는 문제를 동시에 생각하고 고민해야한다. 게다가 사회이동 즉 상하이동이 급격해지고 불안정해짐에 따라 지주적인 계층이 형성될 수 없어서, 갑자기 하강하게된, 또 하강될 위험을 의식하는 기성 세대는 자기들이 다 못 이룬 한을 젊은 세대를 통해 풀려고 하기 때문에 오늘의 젊은이는 더욱 무거운 정신적 짐을 지고있다.
셋째, 오늘의 젊은이는 이기적 기성세대, 편협한 기성세대로 인해 더욱 어려운 형편에 놓여있다. 비교적 안정된 생활률 속에 사는 오늘의 기성세대는 자기세대에게는 관용하면서도 젊은 세대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하다. 이들은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젊은 세대를 의혹의 눈초리로 경계하게 된다. 일제시대만 하더라도 기성세대는 오늘에 비해 젊은이의 행동을 도전이나 반항으로 보지 않았었다.

<전 근대적 자녀관 고쳐야>
그 당시에 「망토」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던 고등학생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낭만과 호연지기에 차 있었고, 이러한 젊은이의 기상을 꺾지 않았던 기성세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기성세대는 어떤가? 젊은이에게 군림하려고 하든지 아니면 옹졸한 편협의식에 사로 잡혀 있지 않은가?
네째, 오늘의 젊은이는 이중적 생활을 하고있다. 특히 고등학생의 경우 학교에서는 편제화된 분위기 속에서 기율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학교 밖에서는 기강 없는 생활을 하고있다. 이들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생활원리인지 알지 못한 채 「지킬」과 「하이든」의 이중생활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이 문제는 심각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뚜렷한 주체의식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주체의식이 희박하다는 것이 또 하나의 심각한 젊은이의 고민이다. 이것 없이 건전하고 창조적인 인간이 되기 어렵고, 그릴수록 내일의 사회가 불투명해지고 불안정해지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며, 내가 어떠한 인간이 되어야하는지를 명확히 모르는 채 젊은 시기를 보낸다고 하는 것은 당사자 개인의 불행임과 동시에 그 사회전체의 불행인 것이다. 그러면 왜 이 같은 고민들이 생기게되는지 그 구조적인 요인을 살펴보자.

우리사회는 대단히 빨리 변화하고 있다. 선진 구미제국이 3백년에 걸쳐 이룩해놓은 발전내용을 단 20년 안에 이룩하려는 의지 속에서 우리는 급하게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급변 속에서 전통적 문화와 구조는 그 힘을 상실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문화와 구조가 옛것을 완전히 대치시키지도 못한 형편이다. 신용의 가치관의 혼존이 바로 우리의 형편인 것이다. 여기에서 기성세대 자신들도 방황하고 있다.
오늘날 부모들 중에는 과연 얼마가 자기 자식들에게 삼종지도와 삼강오륜을 가르치고 있는가? 그렇다고 해서 또 그 얼마가 새로운 서구적 기준으로 자기자식을 지도하고 있는가? 기성세대 자신이 젊은 세대에게 명확한 지도이념을 가지고 가르치고 양육하고있지 못한 형편에 놓여있다. 그러나 기성세대는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전통적인 규범을 적용한다. 노부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이 전통규범을 자기 자식들에겐 강력히 적용시키지 못한 채 엉거주춤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어른들의 방황과 이중생활 속에서 자라난 오늘의 젊은이는 명확한 도덕적 기준을 찾고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행동을 질서 있게 관리 못하게 된다. 자기의 이중행동을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합리화시킬 수 있게된다.
즉 전통가치관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게될 때는 새로운 가치관에 의해 자기를 합리화시키고 반대로 새로운 기준에 의하면 바람직하지 않지만 옛 기준에 의하면 바람직한 행동을 할 때도 자기 행동을 합리화한다. 이것은 영악한 적응생활이다.
결국 젊은이의 이 같은 이중생활은 기성세대의 이중생활에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기성세대의 방황과 결단성의 부족에서 젊은 세대의 방황과 고민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어른들, 부모들이 더욱 반성해야할 것이 또 하나있다. 이것은 곧 한국부모들의 잘못된 자녀관이다.

우리의 자식들은 부모에게 편지를 쓰거나 손윗사람에게 글을 올릴 때, 편지 끝에 「불초자식」 또는 「불초 아무 아무개」라고 쓰도록 배워왔다. 불초라는 것은 닮지 않았다는 뜻이다. 즉 불초자식이란 말은 자식으로서 부모를 닮지 못한 부족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왜 부모를 닮아야 만이 옳은 것인가? 왜 기성세대와 꼭 같은 인간으로 되어야만 훌륭한 인간이 되는가? 여기에 청년문화의 부재논의 전통적 근거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세대격차를 적극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던 유습을 엿볼 수 있다.
우리의 의식구조 속에는 어른과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게 깔려 있는 것이다. 세대간의 연속성이 이토록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우리의 과거에는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질서는 있었을지언정, 개방적이고 창조적이며 개혁적인 진보는 부족했던 것 같다.
이 연속성은 자기 자식을 자기의 부속물로 간주하는 잘못된 인식과 긴밀히 연관되어있다.
「신체발부수지부모」라는 가치관을 생각해 보라.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식이란 한낱 자기의 육체의 연장에 불과하다. 모태에서 나오는 순간 탯줄은 끊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문화 속에서는 정신적 탯줄은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 너는 내 딸이므로 내가 시키는 대로 커야 하고, 내가 보내고 싶은 학교에 가야하고, 내가 만들고 싶은 인간이 되어야 하고, 내가 보내고 싶은 남자에게 시집가야 한다는 논리가 정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자식의 생명의 주체는 자식 당사자가 아니라 부모인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 동석한 자리에 자식의 결혼문제를 두고 질문할 때 으례 부모에게 질문하는 우리네 관습을 보아도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자녀관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식을 자기의 소유물로 보는 폐습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자주 신문에 오르내리는 동반자살 또는 가족집단 자살사건을 생각해 보라. 이것은 자살이 아니라 분명히 타살인 것이다. 부모사후에 자식의 딱한 사정을 핑계로 하여 자식의 생명을 자기생명과 함께 묶어서 끊어버리는 비인도적 행위는 명백히 타살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자살로 인정하는 우리의 생각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자식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인정 못하는 부모의 태도 속에서 우리는 자식이 기성세대의 장식물로 전락되고 있는 엄청난 사고의 비극을 본다. 한국의 부모는 신체적 탯줄을 끊는 순간 정신적 탯줄을 끊어야 할 것이다. 자식의 생명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을 더욱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이른바 「맹렬 부모」 「극성 엄마」들의 의식 속에서도 우리는 자식이 물건으로 전락되고 있고 인간비극을 엿볼 수 있다. 자기의 못 다한 한을 자식을 이용해서 풀고자하는 그 심정, 자기의 「이미지」대로 자식을 진흙의 조각처럼 빚어내고 있는 부모들의 횡포.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오늘의 젊은 세대는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할 새롭고 적합한, 그리고 정당한 가치관을 기성세대로부터 받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성년의 날」은 젊은이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하기보다, 기성 성인이 반성해야 할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기성세대는 어떻게 젊은이를 지도해야 하며, 젊은이의 도덕의식을 창달할 수 있겠는가?
V
무엇보다도 기성세대 자신이 젊은 세대에게 군림하면서 『나를 꼭 닮아라』하는 태도를 수정해야 한다. 기성세대의 복사품과 같은 젊은 세대만이 존재한다면, 즉 세대격차가 전연 없는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는 분명히 질서가 확립된 사회이다.
그러나 이 질서의 대가로 창조와 개혁이 사라져버리는 경직하고 침체된 사회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의 느낌, 생각 및 행동의 방식이 어른들의 그것과 정반대인 사회가 돼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개혁과 발전이 생길 수 있으나 이 같은 창조행위를 오래 지속시킬 질서의 바탕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는 적절한 세대격차가 필요하다.
이 적절한 격차는, 우선 기성세대가 자기를 닮지 않고, 자기보다 뛰어난, 그리하여 자기와 다른 젊은 세대를 육성시킬 때 생기는 것이다. 흔히 기성인들이 젊은이를 꾸짖을 때, 『나는 너희들과 같이 젊었을 때 그렇지 않았다』라는 상투적인 말을 사용한다. 이것은 분명히 시간감각을 상실한, 자신 없는 발언이다. 이미 시대와 사회상황이 달라진 엄연한 현실을 몰지각한 사고방식이며, 나아가 미래지향적인 진취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후진적 사고방식이다.
먼저 기성세대가 보다 큰 자신과 주체의식을 가지고 「불초청년」을 대담하게 길러야 한다. 보다 주체성이 강하고 자신에 넘친 내일의 사회주인공을 형성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기성세대는 마땅히 젊은이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지나친 간섭은 삼가야 한다. 관심을 갖는다 함은 젊은이의 입장에 서서 상황을 판단해 볼 줄 아는 아량을 갖는다는 말과 상용한다. 지나친 간섭을 하지 말라고 함은 자기 기준에다가 젊은이를 묶어두지 말라는 뜻이다.

<좀더 자율적 가정 교육을>
만일 오늘의 기성인들이 젊은이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않고 계속 그 편견을 가지고 젊은이를 대하고 지도한다면, 젊은이는 그 편견대로 되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즉 자성적 예견(Self Fulfilling Prophesy)의 원리가 적용되어서, 젊은이는 그 편견이 예견하는 대로 전락된다. 예컨대 『요즘 젊은이는 퇴폐적이고 버릇이 없다』라고 계속 꾸짖게되면 정말로 퇴폐적이고 건방진 인간으로 변질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젊은이의 외양만 보고 퇴폐적이라는 규정을 내려서는 안될 것이다. 가장 경계해야 할 퇴폐는 도덕적 판단 기준이 없어 방황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젊은이의 도의교육은 학교만 담당할 수 없다. 넓게는 사회 전체가, 좁게는 가정이 도의교육을 함께 맡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가정교육이 중요하다. 먼저 가정에서부터 젊은이를 신뢰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온갖 속박의 탯줄을 끊고 자율적인 인간이 되도록 가르치고 양육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초기 6년 동안은 지나치게 자유방임적 가정교육을 시키다가, 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점차로 속박하는 교육을 하여 스스로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능력, 즉 자율능력과 자주능력을 길러주지 못하고있다.
서구에서는 오히려 이 반대이다. 이런 점을 반성하여 우리는 유아기에 인생의 기초공사를 튼튼히 한다는 뜻으로 철저히 가르쳐서 분명한 정체의식을 넣어주고, 그 후에는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길러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년에 들어가는 젊은이들은 우리 사회현실에 적합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자아실현에 도움되는 정당한 청년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이 청년문화 속에는 젊은이의 분명한 가치관과 도덕의식이 세워져있는 법이다. 이 문화형성을 위해 기성세대는 보다 큰 자신을 가지고 관용의 정신으로 젊은이와 대화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성년의 날」은 이제 막 성년이 되는 젊은이만을 위한 날이 아니라 이미 성년이 된 어른들이 부단히 반성하는 날이 되어야한다. 왜냐하면 자성하는 사람, 자성하는 사회는 진실로 자신에 넘치고 주체성이 강한 발전적 인간, 발전적 사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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