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국적 이젠 바로 볼 때다] 上. 해외 유학·근무가 '족쇄'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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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국적-.요즘 세상에 흔히 있을 수 있는 해외 장기 체류의 부산물인가,병역의무 등을 피하기 위한 고의적 도피구인가. 기업이든 정부든 필요한 인재라면 허물로 삼지 말아야 할 문제인가,철저히 검증해야할 조건인가.

고위 공직자 임명 철만 되면 어김 없이 2중국적 문제가 불거져 나오곤 한다.여론이 갈리고 정부 조직이 휘청댄다.해외,특히 미국을 오가는 한국인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2중국적 문제도 앞으로 더욱 더 늘어나게 되어 있다.

2중국적 문제는 왜 생기고,우리 사회나 당사자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풀어가야 할지 모색해본다.

지난달 하순, 대통령직 인수위 사무실.

대략 5배수로 좁혀진 새 정부 장관 후보를 검증하던 인수위 관계자들은 뜻밖의 벽에 부닥쳤다. '국적' 문제였다.

"추천된 사람 중 본인이나 자녀의 국적 문제가 걸린 경우가 상당수 있었다. 대부분 학자들이었다. 장기 해외 유학 중 낳은 자녀들이 이중국적을 갖게 된 경우가 많았다.

고의적이라고 보이는 경우는 우리가 인선 대상에서 제외했지만, 그렇지 않은데도 본인 스스로 자녀 국적 문제를 들어 처음부터 고사한 경우도 있다."

당시 인수위에서 인선 작업에 참여했던 이호철 청와대 민정1비서관의 말이다.

이중국적 문제는 이처럼 이미 국가적 고민거리가 됐다. 국경없는 경쟁 시대에 유능한 적임자라면 본인이나 자녀의 이중국적을 큰 문제로 삼지 않을 수 있다.

진대제 정통부 장관의 장남 국적 문제가 불거졌을 때 노무현 대통령이 "특별히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판단해 문제삼지 않기로 했다"고 했던 것이 그런 입장이다.

그러나 盧대통령의 이같은 전향적 생각도 아직은 국민정서의 높은 벽에 부닥쳐 있다. 본인이든 자식이든 이중국적자라면 공직자로는 무조건 안된다는 것이다.

"국민정서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이중국적 문제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정부가 이를 어떻게 다루려하는 것인지 잘 모르고 있다. 정확히 알고 나면 국민정서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을 터인데…."

인수위에서 일했던 한 관계자는 "정부는 이중국적을 '허용'하자는 것이 아니다" 고 강조한다.

"아직도 많은 찬반 토론이, 예컨대 '이중국적 허용 여부'라는 식으로 벌어지고 있는데 그처럼 잘못된 토론이 없다. 제대로 된 토론이 되려면 '살다보니 본인이나 자녀가 이중국적자가 된 경우, 이들을 배척할 것인가 아닌가'가 돼야 한다."

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 대부분의 나라는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다만 몇개의 예외가 있을 뿐이다.

인도는 해외 인재 유치를 위해 미국.영국 등 7개국의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이중국적을 인정한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세우면서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을 결속하기 위해 이중국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과 대치하고 있는 대만은 전세계 화교를 네트워크화하기 위해 본인들이 원하기만 하면 이중국적을 인정한다. 중국은 IT.엔지니어 등 고급 인력에 한정해 이중국적제를 운용하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은 둘 사이에서만 서로 이중국적을 허용할 것을 추진 중이다.

미국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단일국적주의다. 다만 미국 시민이 되기로 선서한 사람이 다른 나라 국적을 갖고 있어도 일일이 가려낼 수가 없어 그냥 넘어가는 것일 뿐 미국도 공직자들의 국적은 철저히 가린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 이중국적이, 특히 미국과의 이중국적이 종종 문제가 되는 것은 국적을 주는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은 어느 나라 사람이든 미국에서 태어나면 미국적을 주는 반면, 우리는 부모가 한국인이면 어디서 태어나든 한국적을 준다.

유학이든 지.상사 근무든 미국에서 '오래 살다보니' 본인 또는 자녀가 이중국적자가 되었다는 경우는 이래서 생겨난다.

표에서 보듯 우리 국적법은 만 22세가 되기 전까지는이중국적을 허용하고 있다. 본인이 성인이 돼 국적을 선택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다. 다만 남자는 군대 소집 영장이 나가기 전에 국적을 선택해야만 하므로 18세가 되기 전에 결정을 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 국적법에서도 국적은 '선택'의 문제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대다수의 국민정서는 이중국적을 배척하는 것일까.

"가수 유승준처럼 미국 영주권자로 한국에서 연예활동을 하다가 군대에 갈 때가 되니 미국적을 택해 징집을 피하고는 다시 국내에서 활동하겠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회사원 김우진(34)씨는 이중국적자들의 병역의무를 문제삼는다. 이중국적 문제에서 가장 큰 걸림돌 역시 군대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유승준은 정확히 말하면 이중국적자가 아니었다. 그는 양국의 국적법에 따라 미국적을 택했고, 미국시민이 된 그를 우리가 '입국 거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의견도 있다.

"클리프 리처드는 괜찮고, 유승준은 안된다는 것은 이상하다. 제프리 존스 전 미 상의회장은 얼마든지 한국에서 활동하고 인기 연사로 바삐 돌아다니는데, 한국인으로서 미국적을 취득한 기업인은 우리나라에서 기업활동을 하지 말라고 배척할 것인가."

회사원 박용석(33)씨는 국적이 선택의 문제인 이상 병역을 문제삼을 방법이 없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부모가 아예 자녀의 국적을 미리 선택해주는 경우도 있다. 이른바 '원정 출산'이다.

LA.하와이.괌으로 가서 아이를 낳고 오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이다. LA에는 이같은 원정 출산 고객들을 겨냥해 산후조리원을 갖추고 시민권.여권 발급까지 대행해주는 전문 병원도 생겨났다.

군대를 문제삼는 국민 정서로서는 더더욱 받아들이지 못할 경우지만, 이 또한 국적 선택의 한 방법일 뿐이라고 본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중국적 문제는 역시 해외 유학과 지.상사 근무 등에서 비롯된다.

해외유학은 1980년대부터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80년 당시 1만3천여명이던 유학생은 2001년 말 기준 72개국 15만명에 이른다.

정부는 이들 해외 두뇌를 끌어들이기 위해 각종 유인책을 마련했다. 77년 도입한 대학 특례입학도 그 하나다. 이래 저래 시동이 걸린 해외 두뇌들의 한국으로의 'U턴'이 성장 추동력이라는 긍정적 측면과 함께 이중국적이라는 특혜 .특권 시비를 불러온 것이다.

"같은 이중국적 문제라도 획일적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다. 원정 출산의 경우와 해외유학.근무의 경우를 같이 볼 수는 없지 않은가. 필요한 인재라면 이중국적 문제에 크게 구애받지 말고 공직도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진대제 정통부 장관의 장남 국적 문제가 불거졌을 때 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한숨을 쉬었다.

특별취재팀=김기찬·장정훈·구희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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