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전시의 문화인들(6)|해군종군작가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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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대구에 피난 온 문인들이 공군과 육군종군작가단을 만든 지 얼마 안되어 부산항도의 문인들은 해군정훈감실에 모여 해군작가단을 만들었다.
해군작가단의 경우 해군본부가 부산에 있는데다가 문단의 중진인 윤백남씨(고) 염상섭씨 (고) 이무영씨(고)등이 해군중령 또는 소령으로 현역에 복무하고 있었고 또 안수길 이선구씨 등이 해군정훈감실의 문관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이다보니 자연히 단체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해군작가사의 활동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별로 없고 일선종군도 육군이나 공군에 비해 활발하지가 못했다. 그것은 해군의 일선 종군이 꼭 배를 타고 행동을 같이해야 한다는 제약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대로 종군활동을 본다면 작가단을 만들 때 산파역을 맡았던 박계주씨(고)가 해병대을 몇 번 종군한 것과 박연종씨가 해군함정에 동승하여 20여일 동안 해역을 순회했던 것을 들 수 있겠다.
그밖에 작가단의 활동은 정훈감실에서 발행한「해군」지에 원고를 제공하는 외에 해군문고발행에 협조했던 점을 들 수 있다.

<종군 힘들어 큰 활동 못해>
다음은 해군종군 작가단에 관계했던 문인들의 이야기.
▲이선구씨(당시 해군작가단·작가·58)<1·4후퇴 때 나는 부산으로 내러와 안수길씨와 함께 해군정훈감실의 군학으로 일했어요.
이때 김성삼 제독이 안수길씨와 동향으로 친분이 두터워 부산에 있던 작가들이 정훈감실에 모여든 것입니다.
또 고인이 된 윤백남·이무영·염상섭씨 등은 1·4후퇴 전에 입대하여 영관급 장교로 임관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이들을 중심으로 작가단이 생기게 된 거지요. 작가단은 51년6월께에 만들었으나 종군활동은 활발하지 못했어요.
육군과 달라 바다를 지키는 해군은 동행하기가 힘들었지요.
따라서 작가단이 주로 한일은 정훈감실에서 발간되는 「해군」지 편집과 사병교재 및 사병문고 발간을 들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화낭외사」(김범부 저), 「해군단편집」「이순신」(이무영 저) 등의 책들이 작가단의 손으로 발간되었습니다.
또 이무영씨가 진해통제부 정훈실장으로 계실 때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웠습니다. 조각가 윤효당씨가 조각했는데 표창장과 제작비를 주어야할 판인데 예산이 미처 영달되지 않아 당장 돈을 주지 못하고 액수만 표시된 빈 봉투를 주었다가 나중에야 전달했을 겁니다.
그리고 해군정훈감실에는 해군정훈음악대가 있었어요. 이 음악대는 서울음대출신들로 구성되어 상당히 규모가 컸고 또 해군의 지원도 꽤 있었던 것으로 알아요.
해군작가단이 처음 발족할 때는 일선 종군은 물론 출판사업 등 많은 일을 해보자고 뜻은 컸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결실이 적었던 것 같아요.
물론 인원도 적었고 또 현역복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도 처음에는 문관으로 틀어가 종군작가단의 일원이었지만 나중에는 현지 입대하여 중령으로 정훈차감까지 하다가 예편했으니까요.>
▲박연희씨(당시 해군종군작가단소속·작가·55)<나는 51년8월15일부터 약20일간 해군종군작가단의 신분으로 해군309함정을 타고 일선 해안을 다녀왔어요.
이 309함은 일제 때 만든 낡은 배로 성능도 별로 좋지 않은데다가 별로 크지가 않아요. 3백70t으로 40여명의 해군들이 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종군기는 그 후 부산에서 발행된 「신생공론」이라는 잡지에 실렸는데 종군했을 때는 특별한 사항은 없었습니다. 단조로왔다고나 할까요.

<심한 파도에 멀미 밥 못 먹어>
배가 작고 보니 조그마한 파도에도 심하게 GMS 들렸어요. 비교적 멀미를 하지 않는 편인데도 처음 사흘동안은 전혀 밥을 먹을 수 없더군요.
해군작가단은 인원이 적어서 그랬는지 별로 조직적인 활동을 못했어요.>
▲이봉래씨(당시 해군작가단소속·현 예총회장·48) <솔직히 말해서 해군작가단온 큰 활동을 못했습니다. 대구에 있던 육군과 공군작가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있으니 부산에 있는 작가들도 모여서 일을 해보자고 하여 고 박계주씨를 중심으로 모이긴 했으나 두드러진 활약은 없었어요.
박계주씨가 정훈감실에 드나들며 모든 일을 다했을 정도였지요.
또 육군이나 공군에는 작가단에 단장·부단장·사무국장 등의 제도를 두어 무슨 일을 해도 체계있게 집행했으나 우리 해군작가단은 단장도 없이 처음에 박계주씨가 간사역할을 하다가 나중에는 박연희씨가 간사를 맡았어요. 간사를 중심으로 움직인 것입니다.
따라서 종군활동도 별로 내세울게 없습니다. 육군이나 공군에 비해 정훈감실의 지원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한편 해군작가회의 창설에 직접 관여하여 작가단의 간사를 맡아보았던 박계주씨는 작가단의 창설 경위와 자신의 종군활동을 「정훈대계」의 「해군종군작가단의 활동」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51년 봄 당시 해군참모부장인 김성삼 회장이 나에게 해군에는 해군정훈음악대와 종군화가단이 이미 구성되어 있으니 작가단도 만들자고 교섭해왔다.
이리하여 나는 보도과장인 박태진 소령과 함께 단원 선정에 나섰다.
소설가 윤백남·염상섭·이무영씨는 당시 해군현역장교로 복무 중이어서 그 세분을 빼고 당시 해군정훈감실에서 문관으로 일보고 있던 안수길·이선구 양씨를 위시하여 박연희·공중인·이봉내·김규동씨 등 활동적이면서도 선취를 느낄 젊은이들로 구성했다.
이밖에 여자는 군함을 타지 못하게되어 손소희·윤금숙씨 등 여류작가들이 가입되었다가 이종항·허윤석·박용구·박화목씨 등과 교체되었다.

<「헬리콥터」로 미7함대 방문>
51년8월15일 소설가 박연희씨가 최초로 포함309호를 타고 해군을 따라 북한해안 공격전에 참가했다.
박씨는 22일만에 돌아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멀미는 없었으나 지상 종군과 달리 중도에 마음대로 돌아올 수도 없었고 우리의 포사반은 관찰할 수 있었으나 적이 공격당하는 광경은 전혀 볼 수 없어 솔직히 말해서 22일간 갇힌 몸이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박씨의 보고를 듣자 어느 한사람도 종군하려 들지를 않았다. 그래서 내가 단독으로 종군했다. 바다를 종군하면 글쓸 재료가 별로 없겠기에 지상에서 전투하는 해병대를 종군키로 했다.
51년11월30일 나는 김포비행장에서 미병대의 비행기를 타고 속초비행장에 내려 우선 한국군 1사단을 방문, 3, 4일 예하부대를 시찰한 뒤 12월5일 「헬리콥타」를 타고 동해상에서 함대지휘를 하고있는 미제7함대 기함「위스콘신」호(4만5천t)를 방문했다.
미7함대사령관 「마틴」중장은 친히 나를 자기 응접실에서 접견하고 약 30분간 환담한 후 나를 위해 제일 큰 포문을 열어 8발의 포탄을 발사하도록 했다. 한발에 1천1백「달러」짜리 포탄 8발을 쏘았으니 근 1만「달러」를 소비한 셈이다.
미7함대를 방문한 뒤 나는 곧 중동부전선의 한국해병대를 종군했다.
당시 우리 해병대는 저 유명한 두율산을 점령하여 그곳에 포진하고 있을 때였다.
무산에 포진한 해병3개 대대를 모두 방문하면서 4일간 김일성 고지에 머물렀다. 그리고 계속하여 1백35「마일」의 전전선의 육군 각 사단을 약1개월에 걸쳐 종군하고 부산에 돌아왔다.

<박계주씨는 육군에도 종군>
52년9월 역시 아무도 종군하려들지 않아 나 혼자서 서부전선으로 이동한 해병대를 찾아 임진강 북쪽에 포진한 각 부대와 포부대 「탱크」부대를 종군한 뒤 판문점 휴전회담 장소에서 회담광경을 구경하고 중부전선의 육군2사단에 종군했다. 그리고 계속하여 백마고지의 혈전을 초일부터 6일 동안 참관했다.
결국 해군종군작가단에서는 거의 나 혼자만이 종군활동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해군정훈감실에서 출판비용을 내어 단원들이 집필한 단편집이나 기타해군문고를 발행하여 호평을 받았다.
해군종군작가단은 아니지만 장남이 해병장교로 있었던 관계로 문필가 이명온 여사가 각 전선의 해병대를, 심지어는 원산 앞바다의 여도주둔 해병대 및 서해 백령도를 종군했던 것을 부언해둔다.』
주요일지(1953년1월13일∼16일)
※13일▲새 중공군, 서부전선에 투입 ▲「크렘린」, 소위 의사음모사건 적발 발표
※14일▲1명의 반공포로 자살 ▲울릉도, 대설로 교통두절
※15일▲「유엔」군, 판문점 근변서 공세 ▲공중전서 「미그」8대 격추 11대 격파 ▲「이란」에 정치소요 ▲동독 「데아링거」외상을 음모죄로 체포
※16일▲저격병, 능선의 적 공격 격퇴 ▲거제도 수용소의 친공 포로 폭동

<알림>=「민족의 금관」문의나 연락은 전화(28)8211 (교환)의 74번, 야간과 일요일은 (94)3415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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