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특파원이 마지막 본 진통의 현장|미지수의 월남군전력|<신상갑특파원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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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71년초 기자가「사이공」에 발을 들여놨을때의 월남군사정세는 「게릴라」전의 뼈대에 묽게 정규전이 가미된 듯한 전투「패턴」을 보여주고 있었다. 주월한국군과 미군도 이런 적의전법에 대항하기위해 역「게릴라」전법과 고도의 기동성을 갖춘 밀림전의 총아「헬리콥터」를 대량 동원하는 정규전법을 구사하였다.

<「안록」시 사수에 성공>
72년의 월맹군대공세는 그전까지의 「게릴라」·정규전 혼성전법을 완전히 탈피하고 1백%의 정규전 현대로 급선회한 것을 그 특징으로 삼았다. 공세초기에 월남정부군의 북부전선 요충인「쾅트리」성도가 월맹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쾅트리」는 그후 월남군이 탈환했지만 그곳을 지키던 월남정부군의 사기는 한심한 지경을 넘어 개탄할 정도였다. 병사들은 월맹군이 온다는 소리에 공포를 집어먹고 돼지를 한두마리 「오토바이」뒤꽁무니에 동여매고 「사이공」쪽으로 삼십육계를 놓는 탈주병이 속출했다.
이와같은 북부전선의 패퇴와는 극히 대조적으로 남부의 「안록」전선에서는 공산군의 단말마적인 잇따른 각종 포탄세례에도 불구하고 월남군이 「안록」시를 사수하는데 성공하였다. 물론 월남군이 실지회복작전에서 대부분의 고토를 회복한것은 B-52기를 비롯한 미국의 각종전폭기와「하이퐁」항 봉쇄, 미국의 제7함대의 지원이 엄청난 효과를 나타낸데 힘입은바 크다.
1백20만의 월남군대가 「사이공」의 미국대사관 일부까지 한때나마 「베트콩」에게 유린됐던 58년의 구정공세에 비해 괄목할 성장을 보여준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월남군이 월맹군과 1대1로 맞겨룰수 있는 실력의 수준까지 도달했느냐는 언젠가는 있을지 모를 미해·공군지원없는 두군대의 대결을 보지 않고 자신있게 말할수 없을것이다.
월남군의 일부 야전지휘관들은 미군고문관들이 격찬할만큼 역량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군부인사의 원칙이 능력본위보다 「티우」정권에의 충성심이란 측정기준은 월남군전체와 사기에 독소가 되고있다.

<하루백여곳서 충돌>
73년 1월의 「파리」휴전협정으로 문서상으로는 전쟁이 끝났다.
그러나 표범가죽식 휴전선은 하루에도 평균1백여군데가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있다. 「사이공」에서 불과40km 떨어진 곳에서까지도 전투가 벌어지기가 일쑤고 「사이공」도심에서도 매일밤 포성을 들울수있다. 휴전협정후 평화가 얼마나 가까이 온것으로 실감되느냐는 물음에 깡마른 한「사이공」대학생이 「파리」협정후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한것 밖에 달라진게 뭐 있느냐고 반문했다.
휴전협정전과 후의 군사면에서의 두드러진 차이란 미군이 빠지고 월남군과「베트콩」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 뿐이다.
73년 「파리」협정으로 국제감시위원회(ICC)의 결점을 보완한 국제통제감시위원회(ICCS)가 생겨 중요도시에 배치됐다.
그러나 발족한지 만2개월이 지난 오늘 ICCS의 효율성을 검토해볼 때 「제네바」협정으로만들어진 ICC보다 S라는 글자 한자가 더 늘었다는 것 외에 달라진게 없는 것 같다. 기자가 지난번 「비엔호아」 ICCS지역본부에 취재갔을 때 「나는 여기서 생명을 바칠 영웅이 아니며 휴전 위반사건을 조사하기보다는 관찰하러왔다』는 「캐나다」소령의 맥없는 대답은 ICCS의 운명을 점칠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듯하다.

<공산측, 전력축적>
여러 ICCS장교들은 조사(Inverstigate)가 아니라 관찰(Observe)이 자기들의 임무라고 강조하고있다.
ICCS는 자기들의 외교관으로서의 특전과 같은 문제가 튀어나왔을 때에 한해 만장일치의 합의를 볼뿐 휴전위반여부에 관련된 안건은 십중팔,구 서방측과 공산측, 즉 「캐나다」「인드네시아」측과 「폴란드」「헝가리」측으로 대립되어 미결로 끝나버린다.
미·월정보당국은 월맹이 휴전협정 성립후의 첫2개월동안 3, 4만의 군대와 3, 4백대의 전차를 호지명통로를 따라 남파시킨 증거를 잡았다. 월남군대변인은 「사이공」에 있는「프레스·센터」에서 매일 두차례 군사정세를 내외기자들에게 「브리핑」하는데 「브리핑」시간의 대부분은 공산측의 휴전위반 나열로 소비한다. 「탄손누트」공군기지안의 「캠프·데이비드」에 있는 공산군대표단본부에 갔을때 월맹군대표단 대변인은 월남정부군이 계속 도발해오고 있다고 유창한 영어로 선전공세를 펴고 있었다.
ICCS의 활동에 기대를 걸수 없는 실정이기 때문에 휴전위반사건이 계속될 것은 명약관화하고 월맹군은 「파리」정치회담이 실패했을때를 대비, 호지명통로를 통해 계속 전력을 축적할 것이다.

<월맹군의 둔전전법>
월남안에 남아있는 14만명의 월맹군은 지금 제갈공명식 둔전전법으로 자급자족을 꾀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있다. 월남의 정치타결이 잘되지 않는다면 3, 4년후에 전년과같은 월맹군의 대공세가 강행될 위험요소는 계속 남아있다고 하겠다.
미국의 막강한 공군과 해군력의 지원없이 월남군이 월맹군 공세에 버티어 견딜수있느냐는 미지수이나 비관하는 관측도 적지않다. 미국은 경제원조로 월맹을 조종하고 중공·소양국을 통해 월맹의 재남침 야욕을 둔화시킬수 있을 것이다. 월남의 장래는 미·소·중공등 강대국의 호의와 월남국민 자신의 노력에 달려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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