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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 돌리기, 연극은 끝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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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규연
논설위원

미래 예측=중대성X불확실성. 노련한 미래 연구자는 불확실성의 숲에서 작은 거인을 찾아 다닌다. 아직 몸집이 작아 눈에 잘 띄지 않고 진격해 올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일단 쳐들어오면 현실을 무너뜨릴 만한 변동 요인을 잡아내려 한다. 중대성이 커도 뻔히 보이는 미래에는 덜 관심을 갖는다. 남들이 주목하기 때문에 파괴적 충격이 덜하다는 걸 안다.

 피터 슈워츠는 작은 거인을 잘 찾아내는 미래학자로 유명하다. 로켓엔지니어 출신인 그는 에너지 기업인 로열더치셸에서 미래 전략을 세우는 역할을 맡는다. 소련이 막강한 제국을 자랑하던 1983년 ‘소련 붕괴’라는 대담한 시나리오를 내놓는다. 사람들은 몽상이라고 비판하지만 회사는 이를 받아들인다. 제국 붕괴 이후 시베리아 천연가스가 쏟아져 나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전략을 수립한다. 소련은 붕괴됐고 셸은 기회를 틈타 굴지의 에너지 기업으로 성장한다. 그가 주목한 것은 명백히 보이는 정치적·국제적·군사적 요인이 아니었다. 생산성 저하 같은 미세한 경제요인을 잡아내 ‘철의 제국’의 파국을 내다본 것이다,

 우리는 관료·정치인에게 이런 능력을 기대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돌아갈 때가 있다. 그들은 종종 곧 닥칠 게 뻔한 ‘확실성’이 큰 재난에도 대비하지 않는다. 통상임금 폭탄이 그랬다. 정기 상여금 등을 통상임금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노사정은 놀란 토끼 눈을 한다. 통상임금이 올라가면 수십조원의 인건비 상승 요인이 생긴다고 주장한다. 국가경쟁력을 걱정하는 소리도 나온다. 숲에 숨어 있던 작은 거인에게 당했다는 말인가.

 통상임금 논란은 아주 오래된 화두다. 1971년의 일이다. 월남에서 일하고 온 근로자들이 부당한 임금을 받았다며 자신들을 고용한 종합상사를 습격한다. 그때도 통상임금에 각종 수당을 포함시키느냐가 관건이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돼 근로자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이 나왔다. 88년 노동부는 통상임금 산정 지침을 내놓았다. 정기 상여금·수당을 통상임금에서 배제하는 행정지침이었다. 노사는 25년간 이 지침에 따라 임금협상을 해왔다. 96년 지침을 뒤집는 판결이 나오는 등 논란은 계속됐지만 외환위기가 닥치기까지는 큰 사회문제가 되지 않았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가 들어서면서 파괴적 변화가 시작된다. 노사 모두 기본급을 놔두고 각종 수당을 신설해 올리려 한다. 사용자의 이해관계는 이랬다. 경기가 안 좋아져 종사자를 줄일 때 기본급 비중이 낮을수록 퇴직금 부담이 적다. 경기가 좋아져 초과근무를 시켜야 할 때도 수당만 주는 게 유리하다. 노조의 속내도 있었다. 회사와 투쟁해 임금을 올리면서 복리수당을 곁다리로 따왔다고 생색을 낼 수 있다. 누더기 임금 구조는 이렇게 퍼져나갔다.

 노사보다 더 비겁한 쪽은 노동당국이었다. 산정 지침을 고쳐야 한다는 경고가 25년간 쌓여 왔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전직 노동부 간부는 “문제를 피하는 데 바빴다”고 고백한다. “문제는 알았지만 손을 대면 큰 혼란이 올까 봐,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바랐다.” 고용노동부는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부랴부랴 조정위원회를 꾸렸지만 때는 늦었다. 노사정의 침묵 속에 폭탄의 타이머는 재깍재깍 돌아갔다. 그리고 이제 연극은 끝났다. 놀란 척은 그만 하자. 이쯤에서 솔직해져야 한다. 임금 구조의 왜곡을 알고도 모두 이용하지 않았나. 노사는 다음 노사로, 정부는 다음 정부로 부담을 떠넘기려 하지 않았나.

 “판결 내용을 뜯어보라. 경영 혼란을 우려해 소급 적용 여지를 줄이려 했다.” 대법원 고위 인사는 과거가 현재의 발목을 잡지 않게 고심했음을 내비쳤다. “정작 걱정은 미래”라고 이 인사는 말했다. “과연 노사정이 새로운 임금체계를 도출해 낼 수 있을까.” 침묵의 폭탄 돌리기, 무언극 후편이 시작될지 모른다. 비관적 미래 예측=무책임(중대성X확실성).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