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림 시인|참된 「한국적인 시」의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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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시의 「이즘」은 고사하고라도 시를 다루는 입장을 크게 두가지로 나눠서 생각할수 있다. 하나는 자기나라 사람만이 알수있는 작품을 쓰는 경우와 다른 하나는 세계적인 유통속에서 작품을 다루는 입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뿐아니라 세계 어느나라에나 있는 일이긴 하다. 다만 어느쪽이 성하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는 근자에와서 이두가지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50년대 이전만해도 「로컬리즘」이 지배적이었다. 「코즈모폴리턴」의 성질을 띤 작품은 이단시되어 왔다. 지금도 세계속의 한국을 의식하지않는 일부 시인들은 국제감각을 외면하고 토속적인것에 거의 쇄국하다시피 하고있다.
대체로 영·미·불·독·일등의 현대시인들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시를 쓰는것같고 전제적이거나 후진국에서는 자기들과 자기나라것만을 고집해버리는 성향이 농후한것 같다. 전자는 국제사회속에서의 자아를 인식하지만 후자는 영광된 조국과 빛나는 전통속의 자아를 의식하고 나설 따름이다.
우리는 흔히 한국적인것을 내세우고 있다. 외국시인들과의 경쟁에서 견딜수있는 것은 현재 이것밖에 가지고 있지못하다. 우리의 특색은 다른 나라에서 따를수 없을테니까 독보적이다. 하지만 이 한국적이라는 것도 따지고보면 동양적인 것의 일부거나 본시 중국적이던것의 토착화된것임을 알수 있다. 중국의문화와 사상의 영향권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한국적이라고 부르는데 불과하다. 이제 우리가 서구의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여 토착화시키는 일은 한국적인것에의 새로운 지향이라고도 볼수 있다. 따라서 「코즈모폴리티」를 한갓 한국적인 것의 포기나 정신의 방황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편견이 아닐수 없다.
2차대전후「하이델베르크」大學의 총장이던 「칼·야스퍼스」는 개강에 앞서 학생들에게 『우리들은 다시금「괴테」에 돌아가는 일이 의무이다』라고 연설했다한다. 이말은 「야스퍼스」가 「나치」의 광적인 국수를 부정하고 참다운 독일적인것의「심벌」로 「괴테」를 내세운 것이라 볼수 있다. 그런데 「괴테」만큼 진보적인사람도 없었던것 같다. 모르긴 해도 세계문학이라는말을 최초로 들고나온 사람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결코 협의의 애국자가 아니었다. 어느 의미에선 외국문화의 숭배자였다. 「코즈모폴리턴」이라고 볼수 있다. 가장 독일인답지않은 「괴테」 가 독일적인것의 간판처럼 내세워지는것은 세계적인데 뿌리박고있는 그의 폭넓은 정신유산을 부정하려야 부정할수없는데 있다. 「나치」도 그를 부정하지 못했고 동독도 그를 적으로 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그의「코즈모폴리티」가 가장 독일적인것이 되어버린것이다.
결코 우리는 외국의 것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이것을 우리의 토양위에서 위대하게 꽃피울 때 세계가 알아주는 어쩔수 없는 한국적인 것이 된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남이 알아주는 한국적인 것이 진정한 한국적인 것이 아닐까. 왜소한 한국적인 것의 소아병적인 사고가 선민의식과 국수주의에 맞닿아 버릴까바 오히려 걱정이다.
이달에는 중진과 신예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김완섭씨의 『시간』(시문학) 은 문제에대한 해답으로 쓰여진 시로 볼수있다.
시간에대한 관념이 인생론적 「모럴」로 강조되어있고 얼마간 교훈적인데도 곁들이고 있다. <시간은 달리다가도 허술한 집에 들러 시인의 말을 빛내주고 성인의 뜻을 받들어 전한다>는 종구는 이시인의 관념이 개안의경지에 이른것을 나타낸것으로 볼수있다.
박남수씨의 『무제』(월간중앙)는 오랜만에 각박한 심정을 훈훈하게 덥혀주고 있다. <시간의 쓰레기통에 던져지고 그리고도 남은것은, 모두 우리의 가슴을 덥혀주고 있다.> 이시인에게 있어서 시간은 온갖것을 버리는 쓰레기통으로 비유된다. 이것에 버리고도 남는 것, 그것은 가령 나의가슴을 덥혀주는 5만년전의 햇볕이며 우리의 가슴을 덥혀주는 50년전의 포도주이며 민족의향기를 뿜는 5백년전의 접시한장이라고 예증한다. 이세낱의 복황이 모두「5」라는 수치로 강조되어있는데 묘미가있다.
인류의 시원을 5만년으로보고 포도주는 묵힐 수록 좋다는데서 한 50년을 잡은듯 하고 5백년전의 접시라면 이조백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재미나다.
정작 늙은 마누라의 눈짓을 이야기 하는 이 시인의 「에스프리」는 늙음을 모르는 발랄한 데가있다. 상과 표현기법에 성숙을 더할 뿐이다.
황금찬씨의『오늘에 앉아서』(월간중앙) 또한 시간성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온갖 현상적인 상황을 <무한한 과거와 영원한미래의 중간>에다 놓고 『그것이 한없는 고독이다』라고 철학적인 명제에 귀납시키고 있다. 고독이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으로서 제시된 평범의 비범화를 볼수있다.
김선영씨의 『탈출하는살』(현대시학)은 57편의 단장으로 묶어져 있다. 일관된 「테마」 나 상호연관을 찾아볼수 없지만 아무렇게나 골라 읽어도 놀라움이 있고 당돌한 「이미지」 의 충돌이 있다. <벌레 하나가 벌판 하나를 엎어 놓는다 (1행략) 부엌에 살던 벌레 쓸어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이 시인을 보아온 정서적 「이미지」만으로서는 선뜻 감득되지 않는다. 약동하는 「이미지」 에의 지향을 볼수있는 기법상의 변모가 드러나있다.
정현종씨의 『춤춰라 기뻐하라 행복한 육체여』(시문학)는 산문시형을 취하고 있지만 강렬한 「터치」가 첫행부터 독자를 사로잡아 간다. 환상적인 이야기에다 현실감각을 짙게 「오버랩」 시켜놓고 있다. 「이미지」의 폭발력을 보여주고있는 긴박과 절규에찬 작품이다. 비유로서 배경을크게 흔들어 놓고있다.
오랜만에 대한 김하림씨의 『바람』(시문학)은 5년전의 「베이스」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듯한 느낌이다. 다만 진경이라면 얼마간 발랄한데가 가신대신 발상이 좀더 차분해지고 내면을 들여다 보기시작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밖에 김종삼·문덕수·이유경·김종철씨등의 문제작과 「신년대」 동인들의 특집 (시문학) 을 다루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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