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판자집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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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슬럼」(빈민가)은 도시생활의 낙오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매립지·하천변·저습지 아니면 고지대 등이 주로 이런 곳이다. 울창한 「빌딩」 숲의 뒷그림자 속에도 때로는 「슬럼」이 있다.
이들은 대개 도시의 변방 아닌, 바로 도심의 틈바구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이 특징이다. 유난스럽게 그것이 우리의 눈에 띄는 것도 그런 때문이다. 도시의 경계를 벗어나면 「슬럼」의 풍경은 그렇게 두드러지게 시선을 끌지 않는다.
도심에 「슬럼」이 파고드는 동기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최저의 생활자들이다. 빈곤한 생활에 교통비까지 부담하는 것은 여간 힘겹지 앉다. 그들은 도심에 밀착해 살면서 모든 편의에 무상으로, 아니면 불법하게 편승하고 싶어한다. 『걸어서 왕복 할 수 있는 범위』(walking contact area) 는 「슬럼」의 요건이다.
「슬럼」(slum)이라는 말의 어원도 그런 것에서 비롯되었다. 「슬럼버」(slumber)-, 이 말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선잠을 잔다』는 뜻. 그럴 수밖에 없다.
도시의 온갖 소음을 판자 한 겹으로 가리고 있는 집에서 깊은 잠에 들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슬럼버」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활동을 멈춘 채 꼼짝 않고 있다』는 뜻. 폐쇄적인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슬럼」의 주택도 불량할 수밖에 없다. 미관이 좋을 리 없다. 또 한정된 도심의 구역에 그것은 팽창하기 때문에 합법적인 대지를 구할 수 없다. 그 빈민들은 도심의 지가를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도 없다. 따라서 무허가 건물이 되고 만다.
이른바 서울의 판잣집 촌은 그런 경우이다. 무려 23여만 채나 된다고 한다. 외지(지) 등에 수도 서울의 한 면모가 판잣집으로 대신되는 때는, 한편 곤혹감을 느끼며, 또 한편으로 우리의 발 밑을 내려다 보게 된다.
「슬럼」을 배척하거나 백안시하는 상도는 물론 너무 「에고이스틱」(이기적)하다. 가난한 이웃일 망정 사랑하는 태도나 자세가 우리에겐 더 절실하고 아쉽다. 선진국에서 빈민가를 『악의 온상』으로 사회 문제화하는 경우와 우리와는 좀 다르다.
서울시 당국에서 이 「슬럼」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은 기대해 불만하다. 이들에게 국·공유지를 내주어서 생활의 환경을 닦아준다는 것이다. 『현실적인 해결』이란 그 만큼 설득력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은 겨우 도시계획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 그 후의 도시를 어떻게 지켜나갈지 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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