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0)<제30화>서북청년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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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주폭동 평정>
앞서 말한대로 남선일대가 안정을 찾게됨에따라 우리는 행동의 주력을 제주도로 돌려 많은 일을 했다.
제주도는 국방경비대의 1개대대이상이 주민 4∼5만명을끌고 한라산에 올라간 4·3폭동에서 나타났듯이 좌익의 준동규모가 너무나 커 지금까지의 본토소동은 댈 것이 아니었다.
4·3폭동 당일 김달산(당시 제주시서 약국경영)이 지휘하는 입산부대에 우리대원 5명(모두 성명미상)이 피납, 굴 속에서 학살된 것을 「스타트」로 서청의 피해도 따라서 엄청났다.
서청의 희생자가 대부분 제주도서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큰 피해였다.
제주도엔 이미 47년 봄부터 대원들이 파견되고 있었지만 본격적인 진출은 4·3폭동이후였다.
조병옥경무부장의 요청으로 5백명의 대원이 하루아침에 경찰로 임관되어 김태일경무부경부과장이 지휘하는 현지경찰전투대(대대장은 현경향신문사장 최치환씨)에 편입. 불을 뿜는 토벌전에 나서는가하면 7백여명은 국방경비대2연대장인 송요찬소령(당시)의 요청으로 군인이되어 내려가기도 했다.
경찰로 내려간 대원들은 2, 3일 동안의 훈련만 받은 뒤 곧장 순경계급장을 달았으며 군인이된 대원들은 모인자리에서 계급장을단 급조군인이었다.
사태가 얼마나 급했던지 송소령은 그때 김재능지부장울 앞세우고 상경, 내앞에 꿇어앉아 『나, 병력 좀 주셔야 겠읍니다』라고 빌다시피했다.
서청은 이밖에도 1∼2백명씩 편성된 토벌대를 계속파견, 병력강화를 도왔으며 이들은 군·경의 신분으로, 혹은 서청의 신분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반공 최일선을 맡아 목숨을 바쳤다.
면마다 돌성벽을 쌓아놓고 낮에는 산으로 쳐올라갔다가 해가지면 성내로 쫓겨내려오는등 싸움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당시는 국방경비대와 경찰이 제구실을 하지 못할때라 우리대원들이 아니었더라면 『낮에는 대한민국, 밤엔 인민공화국』인 제주도평정은 쉽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도민의 피해도 엄청났었지만 이점은 지금도 자부할 수 있다.
뒤의 일이지만 제주도평정에서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는 신생모국방장관이 우리 대원들의 비위를 잘못건드렸다가 혼비백산, 삼십육계를 놓은 사건이었다.
49년초의 일로 신장관은 그때 이윤영사회부장관과함께 이대통령의 명을 받아 토벌대 격려및 지방민 선무차 제주도에왔었다.
소동의 발단은 제주도 도청앞광장에서 가진 연설에서 신장관이 오발을 한 것이었다.
그의 말은 『서북청년회원등 육지의 사람들이 경찰·상인·관리등이 되어 제주도에와 도민을 괴롭혔기 때문에 4·3폭동이 난줄 안다. 동정해 마지않으며 앞으로는 치안회복을 위해 도민이 단결, 정부시책에 협조해주기 바란다』는 요지. 한마디로 말하면 폭동이 서청등의 잘못에 기인됐다는 내용이었다.
국내사정을 잘 모르고 한말이겠지만 망발이 아닐 수 없었다.
이말을 전해들은 우리 서청대원들은 싸우다말고 즉각 총을 거꾸로 둘러매고 『신성모×여라!』며 벌떼같이 하산을 하기 시작했다. 맞닥뜨리면 불문곡직 총부리를 갖다 맬 험악한 기세였다.
이날 신장관 몸을 피하다못해 바다로 도망, 해군함정속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다음날 임무도 팽개친채 서울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만큼 제주도는 서청판이었던 것이다. 한편 서청은 이 제주도평정참여를 끝으로 간판을내리고 그해 12월21일 이박사가 총재인 대한청년단에 흡수됐다.
5·10총선뒤 공산당이 불법화되어 표면적인 적이 사라진데다가 이미 우리 정부가 수립된 이상 모든 일을 정부에 맡기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까지 서청을 지켰던 동지들은 각각 지하에 숨은 적을찾아 군문으로, 혹은 경찰로 들어가 그 뒤에도 많은 활약을 하게된다.
나는 『차관자리를 아무거나 하나 고르라』는 박사의 말씀이있었지만 이를 사양, 한청부위원장직을 맡아 청년운동을 계속했다.
나만이 출세를 할 수 없는 일인데다가 마무리를 지어야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 시급한 일은 희생자들의 유족을 돕고 자제들에게 학비를 대주는 원호문제. 우리가 이를 위해 만든 것이 바로 사단법인 현무기업사였다.
현무기업사는 남로당청사를얻어 차렸으며 김이협 전종로지부장이 이사장직을 맡고 각도 대표5명씩이 이사가되어 희생자를 조사하는 한편 ▲부식 군납 ▲제주도특산물반출 ▲전기부속품대북무역등의 사업을 통해 활발한 원호사업을 벌였으나 6·25때 폭격으로 모든 자료가 불타고 일꾼들도 뿔뿔이 흩어짐에따라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말았다.
먼저간 동지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앞으로 힘자라는데까지 옛날 동지들을 다시 모아 뒷수습을 할 날이 있기를 기약한다.
그동안 기억에만 의존해서 이글을 쓰다보니 잘못된것도 많았으며 이점 넓은 양해를 구한다. <초대위원장 선우기성씨이야기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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