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박 대통령은 정답을 알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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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과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의 손으로.’ 이른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 다음 해인 1970년 8월 25일, 스피로 애그뉴 미국 부통령은 주한미군 감축 협의를 위해 급히 한국을 찾았다. 68년 1·21사태, 69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등 북한의 무력 도발이 기승을 부리고 있던 시점이었다. 워싱턴의 주한미군 감축 움직임과 애그뉴의 방한은 심각한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김정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회담 2주 전부터 거의 모든 일정을 미루고 대책 마련에 몰두했다고 회고한다. 두 차례에 걸친 회담에서 박 대통령은 한국의 안전보장과 주한미군 감축문제를 동시에 논의할 것, 한국군 장비 현대화와 장기 군사원조, 2만 명 이상의 미군 감축 불가 등을 요구했다. 애그뉴 부통령도 “7사단은 철수해도 2사단은 잔류할 것”이라며 “감축은 2만 명 이내에서 이뤄질 것이므로 한국 안보에는 아무런 염려가 없다”고 화답했다. 박 대통령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애그뉴 부통령이 회담을 끝내고 타이베이로 향하는 전용기 안에서 사달이 났다. 수행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한국군 현대화가 이루어질 때, 아마도 향후 5년 이내에 주한미군은 완전히 철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사실이 외신을 통해 타전됐다. 사실상의 한반도 포기선언이었다. 심한 배신감을 느낀 박 대통령은 자주국방과 첨단병기 개발을 지시했고, 7·4 남북공동성명 채택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을 모색했다. 나아가 일본과의 연대 강화는 물론 중국과의 수교 가능성도 은밀히 타진했다. 미국의 ‘방기(abandonment) 전략’에 대한 전방위적 대응이었다.

 42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조 바이든 부통령의 방한은 이때와 큰 대조를 이룬다. 바이든 부통령은 12월 6일 박근혜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미국은 한국에 계속 베팅할 것”이라 밝히며 “미국의 반대편에 베팅하는 것은 좋은 베팅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무리 달리 해석하려 애써 봐도 이 발언은 ‘뜨는 중국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한·미동맹을 돈독히 하자, 한·미·일 3국 공조에서 일탈하지 말라’는 경고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애그뉴 부통령은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연루(entrapment)’될까 염려해 한국을 방기하려 했지만, 바이든 부통령은 한국을 미국의 새로운 아시아·태평양 전략에 적극적으로 연루시키고자 하는 워싱턴의 속내를 드러냈다.

 “중국과도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역내 평화와 발전에 기여하고자 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답변은 매우 현명했다. 일방적으로 미국 편을 들며 대중 견제 전선에 ‘올인’할 경우의 파장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한·중 관계 악화와 북·중 관계 개선, 요동치는 남북관계도 명약관화다.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면서 경제는 중국에 기대는 ‘양다리 걸치기(double dipping)’ 전략이 현재로서는 가장 바람직해 보이지만,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장담하기는 어렵다. 또한 아무리 경제적 이익이 중요하다 해도 중국에 편승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 어정쩡한 외교를 펴다가 미국과 중국 모두에게 버림받아 고립에 처할 수도 있는 형국인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과 중국을 뛰어넘어 홀로서기를 시도할 수 있는 처지도 못 된다. 핵무장을 통한 적극적 자주국방이나 영세중립국 선언과 같은 소극적 외교가 우리의 안보 딜레마를 해소해줄 수는 없어 보인다. 참으로 어려운 외교환경이다.

 박근혜 정부의 선택지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시점에서 40년 전 박정희 대통령의 행마를 다시 복기해 보자. 먼저 자주국방의 의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둘째, 한·미동맹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경계하면서 ‘포기’와 ‘연루’의 함정에서 벗어날 외교적 포석을 마련해야 한다. 북한 체제의 포악성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길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셋째, 미·중, 중·일 관계가 개선될 수 있도록 평화와 협력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맡고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주변국들과의 선린, 균형 외교 전개가 필수적이다. 특히 같은 처지에 있는 일본과의 공조도 마다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해법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 속에 모두 들어있다. 대통령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를 창의적 외교와 담대한 뚝심으로 실천해 나가면 된다.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돌발변수에 매달리느라 동북아 전체의 큰 판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잘 만들어 놓은 외교구상을 깨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