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1)제30화 서북청년회(2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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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47년 3월 남선파견대 ?가 핵분열을 거듭하면서 큼직큼직한 사건들이 곳곳에서 불거지기 시작됐다.
당시 남선파견대는 충남·전북·전남·충북의 순으로 도본부를 결성해가며 시·군까지 조직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된 시·군 지부는 ▲서산을 제외한 충남 전지역을 비롯, ▲전북 = 전주·군산·김제·임실·남원·이리등 8개소 ▲전남 = 광주·목포·여수·순천·담양·화순·장성·송정리 ▲충북 = 충주·청주·제천·옥천·영동·보은등 모두 40여개.
특히 전남 도본부는 멀리 제주·서귀포에까지 (당시 제주도는 전남 소속) 지부를 조직해 서청은 벌써 호남·중부 전역을 거미줄처럼 얽고 있었다.

<당시 각 도본부장은 전북="정덕수" (함남 영흥), 전남="계호순" (신의주), 충북="전희벽" (평북), 충남="임일" (총본부가 도본부를 겸했음) 등이었고 사령부격인 도본부 조직은 ▲부위원장 김희현 (전라), 전창록 (평남) ▲총무부장 함성택 (함흥) ▲조직부장 노인규 ▲선전부장 김군희 ▲훈련부장 허태화 (함북 길주) ▲학생부장 박태욱 함주) ▲사업부장 김성련 등의 면면이었다.>
지방세포 조직은 서울에서 소화를 못하는 서북청년들을 무더기로 내려보내는데다가 현지에서도 서청의 실력을 알아보고 파견을 요청해와 순식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처럼 무섭게 번지는 서청의 조직망은 서울을 뺏기고 지방에서 배수진을 치고 있는 좌익에겐 존망을 가름하는 일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지부조직 하나하나가 불청객이요, 독소가 아닐 수 없는 것.
거센 반발은 곳곳을 휩쓸면서 끔찍한 쟁패전을 마침내 불렀다.
그중 참혹했던 비극이 바로 부안사건이었다. 서청이 첫 희생자를 낸 가슴아픈 사건이기도 하다 (l회때의 유성사건을 착오).
땅이 아직 얼어있던 3월초의 일이었다.
부안에 파견됐던 김모씨가 (성명 미상·당시 20세 안팎·평북 철산) 이 마을 뒷산에서 생매장된 채 죽음을 당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김씨는 그곳 독촉국민회 지부장 (성명 미상) 의 요청으로 내려간 선발대 7인조중 한사람.
부안에 내려간 첫날 저녁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갔다 실종, 소식이 끊어졌다가 며칠만에 야행인에 의해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발견 당시 그의 모습은 너무나 처참했다.
손발이 꽁꽁 묶인 채 눈만 내놓고 선 채로 코 이하가 구덩이에 파묻혀 죽어 있었다.
바람을 쐬는 도중 좌익들에게 납치되어 결박 때문에 요동쳐 보지도 못하고 생죽음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이 사건은 무차별 보복을 불러 일으켜 부안을 공포의 마을로 바뀌게 했다. 이튿날 보고를 받은 임일 대표는 즉각 김승호등 대전 주력 3백여명을 출동시켜 부안 전체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누가 좌익이고, 누가 우익인지 알 리 없는 서청대원들로서는 국민회 지부에서 찍은 집이 바로 습격의 대상. 늘 품고 다니는 다듬이 방망이와 몽둥이로 사람은 물론 세간살이까지 무조건 박살냈다. 심한 경우엔 그의 식구에게도 무차별 몽둥이 세례를 안겼다.
사정 또한 둘 리가 없어 죽은 사람을 확인하지 않아 그렇지 피해가 났을지도 모를만큼 극렬하게 행동했다.
당시 서청대원들이 거치지 않은 집이 별반 없었다는 말이 나돌 정도의 전면 보복이었다.
그 와중에서 국민회 지부쪽이 서청을 오도했거나 혹은 서청대원 자신들이 흥분해서 날뛴 결과 애매하게 당한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어쨌든 부안 좌익의 쇠뿔이 단숨에 뽑혀졌을 것이었다. 사람이 죽지는 않았지만 같은 때 청주에서도 피습과 보복의 무자비한 소동은 벌어졌다. 삼균청년동맹 (본부위원장 조소앙) 행동대원 1백여명이 느닷없이 서청 합숙소 (국민신문 옆) 를 야습, 20여명을 부상시킨 것이 발단이 되어 서청도 얼마 뒤 2백여명이 출동, 그 몇 배를 갚았다.
삼균청년동맹은 한독당 산하기관. 얼핏보면 우익끼리의 갈등 같지만 좌익 민청대원들이 서류상 단체를 탈퇴한 것처럼 꾸민 뒤 삼균에 침투, 서청 습격을 기도한 사건이었다.
부안·청주사건이 원시적인 「테러」교환이라면 3월말 군산사건은 지능적인 보복전이었다.
사건의 시발은 임일 대표가 김득룡 지부장 (함북 부령) 의 요청을 받고 직접 내려가 이북 진상보고회를 열고 있는 군산극장을 좌익들이 습격 (지휘 강공희·그뒤 J고 교사) 해 온 것이었다.
서청측 부상자는 30∼40명. 그렇지 않아도 보복을 할 판인데 이튿날 좌익 남선일보 (사장 김재홍·근민당계) 에선 『서책 「테러」단 두목 임일 내군』이란 「헤들라이」 아래 서책을 모독하는 기사를 1면 「톱」으로 실어 약까지 올렸다.
그러나 보복을 하는데 한가지 장애가 있었다. 두눈을 부릅뜨고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는 사찰계장 백형복 (그뒤 월북) 이 바로 좌익. 설 날뛰다가는 임일 동지고 뭐고 모조리 그의 손에 잡혀들 형편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속임수 음모였다. 먼저 합숙소의 대원 30여명을 그대로 집에 있게 한 뒤 임일등 간부들이 경찰서로 백형복을 찾아가 『좌익들이 우리를 습격온다』는 거짓 정보를 넣었다. 서청의 보복을 예상하고 있던 백은 반신반의하며 합숙소를 직접 살펴본 결과 대원들이 몽땅 그대로 있자 그제서야 믿고 경찰기동대를 모두 불러 경비를 하기 시작했다.
남선일보 주변은 자연 경찰 공백상태. 이 틈을 노려 서청은 각 간부집에 기숙하던 대원 30여명을 모아 신문사를 기습, 활자판을 뒤엎고 윤전기에 모래를 치는 등 1주일동안 신문이 못 나오게 만든 뒤 딴지방으로 줄행랑을 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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