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출항제-김명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겨울의 부두에서 떠난다.
오랜 정박의 닻을 올리고
순풍을 비는 출항제,
부두의 창고 어둑한 그늘에 묻혀 남몰래 우는
내 목숨 같던 애인이여.
오오, 무수히 용서하라 울면서 지켜보는 시대여.
지난 봄 갈 할 것 없이 우리들은 성실했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
맨 몸으로 떠나는 날의 새벽,
눈 내리는 세계.
우리들의 항해일지 속 뜨거운 체험으로 끼워 넣으며
불손했고 쓰라렸던 사람을 덮는다.
감동도 없이 붙들어 지키리 신념도 없이
한 때 깊이 빠져가던 우리들의 탐닉,
일상의 식탁과 우울한 밤의 비비작 거림이
한갖 구설의 불티처럼 꺼져가고 있다.
이제는 당당하게 떠나리라,
아, 실어 오린 전생애는 제 나이만큼 선창 속에서 보채고
흰 가슴에 사나운 물빛을 커들고
먼바다로 달려가는 무서운 시간들.
내 의식의 깊이를 횡단해 가는
알 수 없는 설레임도 들리고 있다.
차가운 눈발의 동행 속에서
하얗게 서려오던 유년의 숲.
꺽어진 꽃대궁을 끌어안고
그때 눈물로 다스리던 가슴이여.
북풍처럼 사납게 몰려와서
목숨의 한끝을 쪼아대는 이웃의 이목 속에서 피 흘리고
문득 생사의 늪에 앙상한 채 버려지던 지난날,
마지막 한 방울의
숨어 있던 야성의 피가 깡깡 굳은 풍토병을 적시고
한 세대의 사슬을 의롭게 풀어내던 것을,
질기고 칙칙한 동면을 몰아세우고
우리들은 깊이 잠든 식솔들을 마저 깨웠다.
불면으로 지새우며 밤새껏 항해도를 뒤적이며
아, 버려진 모든 목소리를 새롭게 걸러내며
내 울음이 시대의 물 목을 지켜서고.
이윽고 여명 속에 떨어지는 아득한 별빛,
우리들은 마침내 물빛 푸른 어장을 찾아내었다.
풀려나는 긴장으로 또 한번 감기는 눈꺼풀 속을
파고드는 새벽잠을 털어 내고
성실한 두 팔로 기어오르는 불안을 뿌리칠 때,
차고 맑은 파도처럼 떠도는 저 보이지 않는 역사의
끈끈한 적의를 안개처럼 피워 올리며
난파의 갯벌을 휩쓸며 바람은
한때 우리들이 열던 출항의 부두로 내리 몰지만
허나, 굳센 믿음의 밧줄을 이어 잡으며
목숨의 한끝을 건져내는 강인한 힘,
우리들은 불의 함에 온 몸을 태운다.
아직도 몰아치는 눈보라에 하염없이 쓰러지며
이마 윙 솟는 피만큼 검붉게
흉중을 헹궈내는 식률이여,
이제는 내 돗폭의 그늘에 마저 숨어라.
신선한 믿음도 밑바닥이 보이잖게
금린 밝게 떠드는 물빛, 아침의
아아, 무한한 폐활량.
우리들은 태어나지 않은 역사의 새로운 잉태 속으로 떠난다
온 핏속에 또다시 떠도는 체험의
오오, 무수히 용서하라, 울면서 지켜보는 시대여
비로소 우리는 오랜 정박의 닻을 올리고
순풍을 비는 출항제,
겨울의 부두에서 떠나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