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1)-새해 새 아침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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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어찌해서 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가. 오늘날 사람들은 고도로 발달한 과학문명에 시달리어 제 본바탕을 잃었다. 현대의 복잡한 와중에 휘말리어 사람들은 너무 욕망에만 급급하고 이성마저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본바탕은 죽어버리고 모든 기존질서는 깨지며 개인과 가정·사회와 국가 죄다 안정을 잃어 혼란의 시대에 빠져들었다.
물론 사람은 욕망 없이 살아 갈 수는 없다. 하나 욕망은 그 자체가 진실치 않은 것이고 또 욕망이 욕망을 거듭 불러일으켜 늘 욕구불만의 상태이며 끝내는 혼란을 빚어낸다. 또 사람은 이성만으로도 불안을 면할 수가 없다. 오늘날 세계가 허무와 절망에 젖어있는 것은 이성에만 의존하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성을 되찾고 주체성을 바로 세워야하지, 이성조차 올바로 발휘하지 못하는 채 그때 그때 욕망대로만 산다면 오늘날의 불신과 싸움과 타락과 파멸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러나 한국사람은 능력과 소질이 풍부한 민족이다. 외국인과 비교하고 또 과거 우리의 문화를 돌이켜 보면 창조력으로써 문화의 깊은 데를 파고드는 그런 능력이 풍부했음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나는 역사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라 잘은 모른다. 하지만 삼국 특히 나대 때는 당나라의 영향으로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창조적 능력을 힘껏 발휘하고 주체적 정신을 충분히 지녀서 융성한 나라를 이룩하였다. 그런데 고려 때에는 이런 것을 지켜내려 왔을 뿐 그 이상의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너무나 욕망에만 급급>
현상유지란 곧 보수요, 결국 타락의 실마리가 되기 마련이다. 더구나 이조에 이르러서는 인간 바탕의 정신을 말살시켜 이 민족으로 하여금 종교심을 잃어버리게 했다. 중국을 대국이라 섬기고 한문을 진서라 하는 등 주체성을 잃은 반면에 사대성만 강조했다.
나는 스승의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거니와 3·1운동 무렵 당시 한말의 고관이었던 분에게 만세 운동에 동조해 줄 것을 청한 즉 임금을 위한 것이라면 몰라도 민중의 운동엔 가담할 수 없다고 사절하더라는 것이었다. 참다운 대중을 위해 훌륭한 일을 아니하려 하고, 다만 의리와 형식에 취해버린 것이 이조의 지도자들이요, 지성들이며 사회 논리였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훌륭한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민족적 대세로 볼 때 주체가 약했다고 할밖에 없다.
그러한 역사적 조건에 의해서인지, 오늘날 우리 한국에 훌륭한 사람이 많다 하겠으나 「간디」와 같이 한 민족의 혼을 흔드는 위인은 부족한 느낌이다.
외국 문물을 받아들임에 우리의 생활에 맞게 활용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껍데기만 아는 게 지금 한국 지성인의 약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거기에는 알맹이가 없고 냉정한 비판도 있을 수 없다.
다만 내가 도산 안창호 선생을 위대한 분이었다고 믿는 것은 우리동포들이 그의 주변에서는 마음을 새로이 하고 훌륭하게 개혁하는 그런 감화력이 많았기 때문인데, 곧 그분은 주체성이 강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겉만 배우는 외국문물>
우리 민족은 그 같이 참사랑의 능력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능력을 개발하는 면에서도 뛰어난 바가 있다.
동양의 종교사를 보면 우리 나라에서 훌륭한 종교인이 많이 났음을 알게 된다. 승랑·원측·의상·의천·지눌 등 모두 뛰어난 종교인이며 사상가였다. 참으로 참사랑을 개발한 분들이다.
그런데 그후 그 훌륭한 전통을 잘 계승하고 개발하지 못한 것이다.
서로 존경하고 도와서 살면 인류에 크게 이바지할 민족인데, 그것을 죄다 덮어버리고 스스로 열등시해 오는 동안 우리의 깊이 있고 창조력 있는 민족성을 상실한 것이다. 그 대신 그때그때 자기 욕망만 채우려는 습관이 생겼으며 서로 돕고 단결하는 것을 잃었다. 그건 지금 우리의 큰 결점이다.
요즘 권모술수가 횡행하는데, 그것은 욕망의 악용에 의한 것이다. 상대방을 자기의 욕망 채우는 이용물로 생각하고 그래서 남을 자기소유물로 삼으려는 소행이다. 그래 가지곤 인간이 잘살 수 없으며 짐승보다 낫다할 것이 없다. 다만 사람은 욕망뿐인 짐승과 달라 이성을 가져서 훌륭한 것이다. 과학문명도 이 이성에 의해 이룩된 것이다.
하지만 이성만으로는 사람이 가진 구경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 이성에 의하여 가치 있는 것을 분별하고 실현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이성 그 자체에는 거짓이 붙어 있는 것이어서 모순이 생기고 이율배반에 빠진다. 바꿔 말하면 사람이 산다고 할 때 죽음이 수반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이성을 「참」이라고 한다면 그 구조에는 상대적으로 「거짓」을 수반하는 고로 인간의 이상을 다 실현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궁극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성만으론 해결 못해>
그러므로 이성을 초월한 영원한 진리-거기에 인간 바탕의 절대자가 있다. 말하자면 생사도 초월한 순수한 근본, 그 사람된 바탕을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나는 「차별 없는 참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차별 없는 참 사람은 부처도 중생도 없고 예수도 하느님도 없으며 인종의 차별이나 지배·피지배의 격차도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은 욕망의 「나」라든가, 이성적인 「나」라든가, 그런 게 아닌, 그 바탕이 되는 「참 나」를 일컫는 말이다. 그것은 나와 네가 서로 독립적으로 인정됨으로써 상대방을 자기의 연장이나 소유물로 여기지 않는 것이며, 「참 나」 「참 사람」의 바탕에서 개체와 개체,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가 서로 존경하고 서로 독립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된다.
차별 없는 참 사랑은 부처나 하느님보다도 더 존중한, 이 세상에서 가장 존중한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것은 특별한 사람만이 체험하는 것이 아니며, 또 현재 팔팔하고 자유자재하게 살아 있는 것. 이것을 믿고 사는데 질서가 있는 것이며 이 바탕에서는 누구나 평등한 것이다.
이야말로 절대평등이다.
흔히 법적 대등을 주장할 때는 욕망과 권리를 앞세우는 평등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늘 싸움이 붙기 마련이다. 세계를 평화롭게 건설하자면 역시 그런 권리와 욕망을 초월한 차별 없는 참 사람의 평등이 요청되는 것이다.

<나와 나는 독립된 개체>
그래서 국가간이든 혹은 국가와 국민 사이든 「참 나」로 인정하고 존경하여 개체의 독립성을 부여할 때 여기 참 사람끼리는 자연 유대가 맺어지고 모든 것이 원만히 해결되고, 나아가 건설적으로 잘 해나갈 수 있다. 그 점은 우리 가정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보통 세상에서는 참 사람으로 서로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욕망으로 보고, 서로 애정으로 보니까 상대방을 자기 소유물로 알게 되는 것이요, 그래서 알력이 생긴다. 또 서로의 껍데기 행동만 보니까 결점이 드러나게 되고 불화가 온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서로 참 사람으로서 존경하고 조건 없이 「서비스」 한다면 훌륭하고 원만한 가정과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요즘 근대화란 말을 많이 쓰고 있다. 그러나 과학문명을 받아들이고 동양과 판이한 서양의 풍속, 껍데기 행동만 모방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근대화란 한마디로 인간 이성의 자각을 뜻한다. 즉 모든 사리를 합리적으로 비판해 질서 있게 해 나가자는 데 있는 것인데, 지금 우리에게는 무엇이 잔뜩 가리어져 있다. 가짜가 판을 치고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한다. 참 사람끼리 대화를 통하지 못해 온통 불신이 범람하고 있다. 그때그때 마음 내키는 대로 이끌리어 살다보니 남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조차 못 믿게 되었고 제 정신도 없다.
이래가지고는 우리의 진실한 근대화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개인적으로는 조화 있는 인격을 만들고 사회적으로는 서로 질서 있고 잘 화합되는 그런 기틀을 마련해야겠다. 그것이 곧 우리가 인간과 국가 사회에 이바지하는 지름길인 것이다. 【백양사 조실 서옹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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