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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돌아갈 순 없어도 돌아볼 순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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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주철환
JTBC 대PD

이맘때면 재미 삼아 ‘10대뉴스’를 선정한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10대뉴스’다. 언론사에서 발표하는 것들과는 상관없는, 그야말로 영향력 하나 없는 ‘내 맘대로 랭킹’이다. 당연히 발표도 안 한다(못한다). 그냥 한 해 동안 내가 연루됐던 일 중에서 흐뭇하고 보람 있던 일 위주로 고른다. 언제쯤인가는 뉴스 10개를 채우기 어려울 때가 올 것이다. 그 무렵엔 특집으로 ‘내 인생의 10대뉴스’도 선정할 예정이다.

 마음에 낀 미세먼지를 없애려면 각자 나름의 영혼세척법이 필요하다. 방송에 비긴다면 세밀하게 마음을 편집하는 행위다. 이런 희한한 습성을 알아챈 누군가 ‘진짜 못 말려’라고 했을 때 내가 한 대답은 ‘그냥 젖은 채로 살게 내버려 둬’였다. 그는 웃었고 나도 웃었다. 건조한 분위기를 잠시나마 촉촉하게 만드는 ‘가습기 같은 언어유희’도 괜찮지 않은가.

 10대, 20대 시절엔 연말에 ‘10대 친구’도 뽑았다. 베스트로 뽑힌 친구를 위해 작은 선물도 마련했다. 상을 전해 받은 친구에게 나는 베스트가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받아준 것만으로도 만족했으니까. 낡은 일기장 속엔 사랑스러운 친구들의 이름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들 덕분에 외로움은 그리움으로, 그리움은 다시 고마움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지난가을엔 실리콘밸리에서 한국인 대상으로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당연히 ‘나의 10대뉴스’감이다. 그때 사귄 친구들과는 즐겁게 교신 중이다. 첫 도착지인 LA 공항에서부터 동행했는데 죽이 잘 맞았다. 한순간도 심심한 걸 못 참아 했는데 그 심심풀이용 취미가 나랑 유사했다. 놀라지(놀리지) 마시라. 만난 지 불과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우린 끝말잇기를 시작했다. 네 글자의 한자어, 즉 사자성어로 잇는다는 게 특이점이다. 나도 한국에서 꽤나 고수라 자부했는데 이 친구들은 이역만리에서 이 놀이에 심취해 있었고 두세 명은 달인의 경지를 넘볼 정도가 되어 있었다.

 정문일침 침소봉대 대성통곡 곡학아세 세종대왕 왕정복고 고도비만… 이렇게 우리는 세상에 떠도는 사자성어를 모조리 등장시켰다. 리듬을 타는 게 중요한데 구구단 외는 속도보다는 조금 빨라야 인정받는다. 놀랍게도 이들의 평균연령은 40대 중반. 도대체 이역만리에 사는 40대 안티에이징 소년들의 비결은 무엇인가. 정답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산다는 거였다. 지루함을 견디는 건 이들에게 고역을 넘어 죄악이었다. 한편 일할 땐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들에게 바쁜 건 나쁜 게 아니라 기쁜 거였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법을 그들은 터득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짐했다. “철들지 말자. 물들지 말자.”

 벤처업계의 심장부를 거닐다 보니 자연스레 두 친구가 화제로 올랐다. 스티브(잡스)는 너무 일찍 가버렸다는 얘기, 빌(게이츠)은 참 잘 늙고 있다는 이야기. 대면한 적은 없지만 나랑 동갑내기 빌이야말로 다재다능, 다정다감한 친구다. 최고의 부자로 뉴스에 나오는가 싶더니 이젠 최고의 기부자로 이름을 굳히는 모양새다. 40대 소년들에게도 그는 영감과 결심의 원천인 듯싶었다.

 내가 선정한 문화계 ‘올해의 인물’은 두 분이다.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여사와 최고령 MC 송해 선생. 영원한 현역인 그들은 88세 전후지만 여전히 팔팔하시다. 얼마 전 아침 프로에 노라노 선생이 출연했다. 다큐멘터리영화 ‘노라노’ 개봉 즈음이었다. 눈빛은 살아있고 목소리엔 자부심이 넘쳤다. 사회자가 물었다. “선생님이 생각하실 때 좋은 옷이란 어떤 옷입니까.” 평생 옷을 만들며 산 그의 의상 철학이 궁금하지 않은가. 대답은 간결했다. “옷이 먼저 보이면 실패한 겁니다. 사람이 보여야죠.”

 명언을 들었으니 이젠 새겨둘 차례다. 절로 응용이 된다. 돈이 먼저 보이면, 명품이 먼저 보이면, 명함이 먼저 보이면 미흡한 삶이로구나. 일요일마다 전국의 특산물을 섭취하시며 만년 청년으로 사시는 송해 선생께는 부상(?)으로 4행시 한 편을 헌정하고 싶다. 시의 제목은 그의 이름을 딴 바다(海)다. “옹달샘은 옹벽을 쌓고 산다/ 새벽에 토끼가 물만 먹고 간다/ 바다는 모두를 받아들여 바다가 됐다/ 물고기와 해녀들이 고맙다고 인사한다”

주철환 JTBC 대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