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우방 참전부대⑪|프랑스 군 대대(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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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국에 참전했던「프랑스」군은 스스로 자산의 십자군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그것은「프랑스」정부가 다른 참전국들처럼 현역이나 일반 지원병을 모집, 파한한 것이 아니라 퇴역 장병들 중에서 지원병을 선발했기 때문이다. 어우기 이들 중에는 2차 대전을 치른 역전의 고참병 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어 실전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한국전에서는 지형과 기후가 익숙치 않은데도 잘 싸웠다.
50년대의 초반 「프랑스」사회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자들이 상당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한국 참전을 계기로 국내 여론을 『자유수호』로 전환 집중시킬 수가 있었다. 즉 한국참전으로 「프랑스」의 민주주의체제가 더욱 굳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각국의 참전장병들은 전쟁이 끝난 다음 대부분 본국에서 참전협회나 친목회 등을 갖고 잇다. 그러나 이같은 활동은 대체로 단순한 친목이나 형식에 그치는 모임에 불과한데 프랑스의 한국 참전협회는 가장 실속 있게 움직이고 있다. 휴전 다음해인 54년에 결성된 참전 협회는 현재의 회원이 1천2백여명으로 우선 규모만 보아도 대단히 크다.

<인지전서「한국연대」로 큰 활약>
장관·국회의원도 역임한 저명인사도 낀 이 참전협회원들은 전사자들의 유족 돕기·상이용사들의 원호활동 등을 협회의 주요사업으로 하고있다. 또 「프랑스」의 참전장병들은 한국을 제2의 고향처럼 생각하면서 언젠가는 한국 땅을 다시 찾으려고 착실히 여비를 저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53년 휴전을 맞이했을 매 한국에 남아있던 1천 여명의 「프랑스」정예부대는 본국의 명령에 따라 「인도차이나」반도로 이동, 그곳에서 공산월맹군과 싸웠는데 이때의 「프랑스」부대는 『한국연대』라는 이름으로 활약했다.
다음은 전회에 이어 장덕상 전 주불특파원이 프랑스 참전용사들로부터 들은 회고담.
▲「드·제르미니」씨(당시 「프랑스」군대연장=중령·예비역준장·현 사업)<나는52년」월 제3차 파견대로 한국전에 참가하여 「바하이」중령과 임무를 교대했읍니다. 한국전은 초기에는 『움직이는 전쟁』이었으나 후기에는 『교착된 전쟁』이었다고 볼 수 있어요. 처음에는 전선의 이동이 심했던 반면 나중에는 일정한 지역 내에서 의치확보가 더욱 중요했으니까요.
53년2윌 「프랑스」군은 미 제2사단과 함께 철원 서남방 마전리 전투에 참가했옵니다.
이때는 별로 큰 접전은 없었으며 정찰임무가 활발하여 소규모 전투가 많았고 날씨가 너무 추워 「유엔」군들은 상당히 애를 먹었어요.
「프랑스」군은 이 무렵 1개 중대의 한국군을 배속받고 있었어요. 한국군이 중심인 제 2중대가 하루는 정찰나갔다가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고전했지만 「르·페브르」 대위가 인솔하는 제3중대가 지원공격에 나가 백병전을 제 2중대를 구출해왔어요 피아간에 상당한 포격을 주고받았으면서도 서로 포를 효과있게 사용하지 못한 형편이었어요.
이 기간 동안 「프랑스」군은 15명 가량 희생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4월 한달 동안 예비대로 휴식한 다음 6우러에는 철의 삼각지 안에 들어있는 중가산 전ㅊ투에 참가했어요
우기의 산악전은 겨울 못지 않게 힘들었어요. 지형이 까다로운데다가 비가 많이 와서 참호를 제대로 이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읍니다.
전투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이야기지만 한국전을 계기로 우방 여러 나라와의 친선이 두터워졌다고 봅니다. 당시 미 제2사단장인 「프라이」장군이 우리부대를 자주 방문했고 전투가 없을 때는 「이디오피아」「터키」등 이웃부대들과 축구 등 친선경지를 여망 했어요.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각 참전국 병사들과 두터운 우정을 나누었지요
그리고 나는「프랑스」장병들의 오락이나 음식에도 상당히 신경을 썼어요. 8군 영내에 『프랑스의 집』을 만들어 사병들이 교대로 즐길 수 있도록 했읍니다.

<이 대통령, 불군의 전과 치하도>
또 아시다시피 「프랑스」인들은 대단한 미식가들이 아닙니까. 미군의 보급도 물론 훌륭했습니다만 이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아 보급부대를 서울로 보내 신선한 야채·생선·감자 등을 사오게 하여 전통적인 프랑스 요리를 만들어 주었어요. 미군이나 그밖의 우방 군인들이 찾아와 같이 나누어 먹기도 했읍니다.
우리는 중가산에서 휴전을 맞이했는데 이 무렵에 「인도차이나」반도의 전쟁이 한창이어서 본국정부는 한국전을 겪은 우리 1천여명의 장병들을 그곳으로 이동시키도록 결정하여 철수준비를 서둘렀읍니다.
53년10월9일 미제2사단 연병장에서 성대한 환송식을 끝내고 나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출국인사를 갔었읍니다. 이 대통령은「프랑스」군의 전과를 높이 치하하면서 『당신들이 우리를 도와주었으니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군이 애를 쓸 때에는 우리가 도와주러 가겠다』고 말하더군요. 이 약속은 당장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몇 년 후에 한국이 월남에 파병한 것을 보면 결국 이 대통령 이야기는 이행된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53년11월6일 한국을 떠난 「프랑스」군은 이미 본국으로부터 도착해 있던 부대와 합류하여 『한국연대』라는 이름으로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가했옵니다.>
▲「앙드레·비비앙」씨(당시「프랑스」군대대=중위·전 주택장관 및 국회의원·현 한국참전협회회장) <한국전이 벌어진지 얼마 안되었을 때 나는 2차대전의 영웅인 「몽·클라르」장군을 만나 한국에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알았옵니다. 또 세계 자유 우방들이 한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프랑스」도 참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장군의 권유로 참전을 결심하게 되었읍니다.< p>

<장군이 중령계급 달고 참전>
나는 이미 현역에서 물러난 후였고 또 결혼도 해서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지만 많은 예비역들이 참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냥 있을 수가 없어 참전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프팡스」 국내의 여론은 한국이 공산주의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것은 전세계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는 것으로 간주하여 꽤 많은 참전지원병들이 몰려들었어요. 한국참전을 계기로 「프랑스」국내에서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자들을 경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프랑스」 정부가 한국참전을 결정했을 때 국방부차관은 「막스전」이라는 사회당 출신 인사였으나 「막스전」차관도 파병결정에 찬동한 것을 보면 당시의 국내사정을 쉽게 알 수 있읍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국들이 신속한 지원을 해오지 않았다면 한반도는 완전히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는데 만일 이렇게 되었더라면 오늘날 서방세계의 판도가 어떻게 달라졌을 지는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몽·클라르」 장군이 중령계급으로 참전하는 등 당시의 첨전 예비역들은 스스로 『자유의 십자군』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있어 「프랑스」예비역들 중에서도 선발된 「엘리트」들이였다고 생각해요
나는 2차 대전 때도 부상했고 한국전에서는 『단장의 능선』에서 만도. 세 차례나 가벼운 부상을 입었어요.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충무무공훈장 등 한국과 미국으로부터5개의 훈장을 받았고 「프랑스」정부로부터는 「레종·도뇌르」훈장을 받았읍니다.
한국전이 끝난 다음 한국에 있던 「프랑스」대대는 곧장「인도차이나」전쟁에 참가, 『한국연대』라는 이름으로 전투를 했고 이들은「알제리」전쟁에도 같은 『한국연대』라는 이름으로 계속 싸웠는데 「프랑스」군사상 『한국연대』만큼 훈장을 많이 받은 부대도 없었을 겁니다.
근우 참전장병들은 54년에 한국참전협회를 만들고 지금까지 활발히 움직이고 있어요. 현재의 협회회원은 약1천2백명으로 모두역전의 용사들입니다.
협회 창설당시에는 「몽·클라르」 장군을 명예회장으로, 나는 부회장이었는데 56년 이후부터 내가 회장직을 맡아 지금까지 운영해 오고 있습니다. 참전협회의 사업 중 전사자 유족 및 고아들에 대한 상호부조나 부상자들에 대한 원조사업 등은 자랑할만한 것이죠. 부상자 중에는 척추환자 같은 영구불구자들도 많아 이들을 보살펴주는 것은 존속하는 한 일종의 의무랄 수도 있어요.

<한국을 제2의 조국으로 여겨>
나는 59년 10윌1일 국군의 날을 기해 한국정부의 초청을 받고 한국을 방문한 일이 있어요. 이때의 기쁨이란 말할 수 없더군요. 71년에도 초청을 받았는데 국내 사정 때문에 못 갔어요.
한국을 방문했을 매 「프랑스」 군의 격전지인 지평리나 『단장의 능선』동을 돌아보고 또 부산의「유엔」군 묘지에 가서 1백여 기의 「프랑스」군 전사자 묘지를 참배했을 때는 눈물이 왈칵 솟을 정도로 감회가 깊더군요.
이 때 나는 나의 제2의 조국은 한국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읍니다.
전투이야기를 한다면『단장의 능선』전투 때 「몽·클라르」 장군은 이 전투야말로 2차 대전 때 「프랑스」와 독일군 수만명이 죽은「베르당」전투보다 더 치열하다고 말했을 정도 였읍니다. 이때 나는.2중대2소대장으로 있었는데 소대원 중 70%의 사상자를 냈읍니다. 931고지 전투 중에는 옆의 참호에 적 포탄이 떨어지면서 흙더미가 무너져 내가 들어있던 참호를 덮쳐 약1시간동안이나 생매장 된 적도 있었어요.>
◆주요일지(1952년 9월13∼16일)
※13일 ▲미함전기대, 회령일대공격
※14일 ▲지형능선서 백병전 ▲신태영 국방, 수도사단의 용전을 칭찬 ▲하루 중단된 평양방송 재개
※15일 ▲미 공군, 14일 야간에 적 「트럭」 1백26대 파괴 ▲90대의 미 「제트」기, 신의주 폭격 중 적기 9대 격추 ▲이 대통령 저격범 언도공판, 김시현·유시태에 사형
※16일▲전전선서 공산군포화 약화 ▲공중전서「미그」기 4대 격추 ▲거제도 제 1수용소서 포로1명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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