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안의 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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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설날을 맞으면서부터 정월대보름·팔월 한가위·단오절 등 우리네 선조들이 떡을 빚고 조상들에게 제사 지내는 명절엔 모든 잡귀를 쫓고 보다 나은 새해를 위해 기원하며 풍악을 울렸다.
또 3, 4월 농번기가 되면 농부들은 농악에 뒤따라 풍년가를 부르며 피로를 잊고 농사를 지었다.
「징」은 이 신나는 풍악의 「앞잡이」. 쇠가 좋은 「징」은 그 소리가 5리를 잇는다고 한다.
경남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 서원 부락은 유래는 확실치 않으나 신라시대 때부터 징과 꽹과리를 만들어온 본고장.
몇 백년을 두고 그 울음소리가 웅장하고 맑아 주변 김천·대구·진주 등지를 비롯, 전라 지방 사람들이 이 「안의 징」없인 농사를 못 지을 만큼 아껴 왔다.
이 고을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대 「시원」 선생이란 분이 징 만드는 법을 배워 토굴 속에서 부부와 함께 징을 만들었는데 그 귀한 기술을 남에게 가르쳐 주기 싫어 남이 보지 않는 틈을 타 1년에 꼭 1개 밖에 만들지 않았을 정도로 그 기술은 배우기 힘들었다고 한다.
이 안의가 징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예부터 거창·함양과 전북 남원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고 주위를 에워싼 산은 쇠를 녹이는 땔감을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는 지리적인 요건을 갖추었기 때문.
해방이 되기전만해도 봉산리를 비롯, 인근 서상면 등 징을 만드는 곳은 5곳이 됐고 『이조 땐 칼을 만드는 장이는 천시했어도 징을 만드는 장이는 대궐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었다』고 부친에 이어 2대째 「징」을 팔아왔던 최두권 노인 (82)은 그 때의 긍지를 자랑했다.
작업은 용해도를 쉽게 알기 위해 하오 9시쯤부터 놋쇠를 녹여 주물로 형틀을 짜면 1천6백도 내외의 고열로 쇠를 달궈 메로 쳐 바닥을 잡는다. 이때 가장 중요한 공정은 달궈진 쇠를 찬물에 담그는 일. 재빨리 계속 알맞게 담가야 쇠가 연해지지만 잘못하면 마치 과자처럼 쉽게 부스러지고 말기 때문이다.
한개의 징을 만드는데는 지시·감독을 맡은 최고 책임자인 대장 (옛날의 대정)을 비롯, 앞과 옆에서 메를 치는 앞메·곁메·선메, 그리고 불무를 젓는 사람과 형틀을 깎아 다듬는 사람 등 모두 6명이 함께 작업을 해야하고 작업 시간도 보통 하오 9시부터 다음날 하오 2시까지. 모두 6개 정도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완전히 형틀이 짜여지면 가질틀 (깎는 기계)에 끼워 칼로 선 (무늬)을 긋고 나서 고요한 새벽을 택해 징채로 쳐 「울음」을 잡는다. 이 「울음 잡는」것은 순전히 기공 (대정)의 직감.
23세 때 도제로 기술을 5년만에 배웠다는 이용구씨 (36)는 『그 잡는 법이 하도 어려워 어떤 사람은 평생 해도 못 배우고 죽는 수가 많다』고 했다.
2차 대전 때 일본군의 공출로 놋쇠가 바닥이 나자 그때의 징 값은 최고를 이뤘다. 『징 한개와 논 한마지기 (당시 15원)와 맞바꿨지요』 심지어 징이 달리자 장사꾼들이 돼지 다리를 미리 갖다놓고 서로 먼저 해줄 것을 조르기도 했다고 최 노인은 말했다.
그러나 이 소문난 「안의 징」의 울음 잡는 소리도 지난여름 들어 뚝 그쳤다.
『직접적인 원인은 최근 강력한 퇴폐 풍조 일소로 인한 새마을 운동과 함께 젊은이들이 풍악을 점점 싫어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고 업자 장훈직씨 (43)는 분석했다.
『작년까지만 연간 7천벌을 만들었는데 올핸 2천 벌도 힘들었다』고 이용구씨는 울상지었고 원료대와 공임을 제하면 그나마 한개 6천원 (소매가)에 팔아도 소득이 보 잘 것 없다고 한다.
『더구나 이 고되고 보수 적은 「징」 만드는 법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없어 앞으로 후대를 잇기조차 힘들지 않겠느냐』고 이씨는 말했다.
글 원대연 기자
사진 김택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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