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 10년 … 손은 가죽공예를 기억하고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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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오산 ‘윌하우스 가죽공방’의 박상기 대표가 직접 만든 보석함을 보여주고 있다. 한때 노숙자 생활을 하기도 했던 그는 ‘독특한 디자인’과 ‘정성이 담긴 수작업’ 덕분에 다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김형수 기자]

지난 주말 오후 경기도 오산시 오산중앙시장. 시장 한복판에 자리잡은 가죽공예 전문점 ‘윌하우스 가죽공방’에 들어가자 가죽 냄새가 짙게 배어났다. 40㎡ 정도 되는 공간에는 그가 직접 만든 가죽제품이 벽면을 가득 채웠다. 각종 가방·벨트·지갑·신발을 비롯해 색다른 디자인의 도장집·담뱃갑·머리핀·휴대전화 케이스 등이 눈에 들어왔다. 매장 곳곳에 놓인 공예 도구와 가죽·실 등 때문에 다소 어수선했지만, 손님들은 이를 아랑곳 않고 재질과 디자인을 살펴보며 제품을 골라 담았다.

 윌하우스 박상기(53) 대표는 작업대에 고개를 파묻다시피 하고 이리저리 가죽을 만지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가 문양을 새기고, 재단을 하자 밋밋했던 가죽조각은 어느새 그럴듯한 지갑으로 다듬어지고 있었다. 윌하우스의 겉모습은 지방 전통시장에 위치한 여느 상점과 다름없다. 특별히 인테리어에 신경 쓰거나 따로 광고를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이 가게의 월 매출액은 2500만원에 달한다. 비결을 물어보니 첫 답변이 엉뚱하다. “저도 잘 몰라요. 그냥 사람들이 많이 와요.”

박상기 대표는 평상시 메모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이를 스케치한다. [김형수 기자]

 사실 가죽제품의 매력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매니어 말고는 많지 않은 편이다. 사람들은 새것을 좋아하지만, 되레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바래가는 멋스러움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저 낡아가는 게 아니라 내 손때와 햇빛·바람·시간에 길들여지면서 독특한 우아함을 자아낸다는 게 박 대표가 강조하는 가죽의 매력이다. 박 대표는 “아직 국내에는 가죽공예가 체계화되어 있지 않아 노하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고 말했다. 게다가 1990년대 외환위기 이후 가죽공예 공방이 대거 사라지면서 이제 가죽을 제대로 다루는 장인은 전국에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 박 대표는 “이런 희소성 때문에 가죽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찾아오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가 직접 공방을 차린 건 1980년대 초반이다. 공고를 졸업한 이후 그림을 배우겠다고 화방을 전전하다 우연하게 접한 가죽공예의 세계에 매료됐다. 대구의 한 가죽공방에서 일하며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운 뒤 직접 공방을 차렸다. 작은 장신구에서부터 문구류·가방·대형 장식품까지 그가 만들어낸 가죽제품은 독특한 디자인으로 좋은 평판을 받았다. 90년대에는 백화점에 납품할 정도로 꽤 크게 사업을 벌였고, 지역 공예협동조합에서 임원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외환위기로 빚더미에 앉게 됐다. 그는 “일본에 수출하기 위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한 게 실패했다”며 “가죽 때문에 망했다는 생각에 가죽공예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고 회고했다.

박 대표가 2009년 초 오산 중앙시장에 좌판을 깔 때 처음으로 내놓은 가죽공예품들의 사진. [김형수 기자]

 이후 약 10년간 전국 교회를 돌아다니며 허드렛일을 하면서 끼니를 해결했다. 노숙자 생활을 하다 동상에 걸리기도 했고, 자살을 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다. 하도 고생을 하다 보니 그의 윗니는 남은 게 없다. 불의의 사고로 오른손 손가락의 일부도 잘려나갔다. 그가 본격적으로 가죽공예 일을 다시 시작한 것은 2009년이다. 그의 재주를 알아차린 오산의 한 교회 목사가 “다시 가죽공예 장사를 해보라”며 120만원을 빌려준 게 계기였다. 그는 아직도 오산중앙시장에 처음 좌판을 깔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박 대표는 “그날 하루 매출이 3만원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주변에서 과연 되겠냐며 비웃기도 했다”며 “그때 좌판 사진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데, 힘들 때마다 이 사진을 보면서 용기를 북돋곤 한다”고 말했다.

 이후 그의 독특한 손 매무새가 입소문이 나면서 서서히 손님이 몰리기 시작했다. 매일 오전 6시부터 가죽 일에 매달려 오후 9시에야 작업을 마치는 고된 하루의 반복이었지만 그를 짓누르던 수억원의 빚도 갚을 수 있었다. 매장도 넓히고 시장 인근에 별도의 작업실도 마련했다.

 그는 가죽공예 전문가로 다시 자리잡을 수 있게 된 비결로 ‘정성’을 첫손에 꼽는다. 수작업으로 한 땀 한 땀 바느질하고, 정성스레 다듬어 만져주면서 제품을 완성해 나간다. 만든 사람의 숨결과 손때가 담긴 수제품의 가치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제품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가죽 원단도 최고급을 사용한다. 그는 내구성이 좋은 천연 베지터블 가죽(가공 과정에서 화학성분이 아닌 식물성 성분을 이용하는 것)만을 쓴다. 화학처리한 가죽보다 가격은 훨씬 비싸지만 더 오래 사용할 수 있고, 가죽의 깊은 맛을 제대로 살릴 수 있다. 가끔은 고객이 가위집·명함집 등 자신만의 제품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제품 디자인에서부터 재질까지 개인의 취향을 반영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맞춤형 가죽제품’을 제작해달라는 것이다. 박 대표는 “가죽의 종류와 색깔은 물론 어떤 장식을 할 건지 원하는 대로 다 맞춰준다”며 “내 스타일을 고집하기보다 손님의 취향을 최대한 반영해 제품을 만드는 점을 고객들이 높이 평가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독특한 디자인도 그가 꼽는 자신만의 강점이다. 가죽은 가공 방법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만들 수 있고, 조각이나 그림을 그려 넣고 염색을 하는 등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하다. 가죽공예에선 디자인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그는 평상시 메모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각날 때마다 이를 기록한다. 그는 ‘요철 문양이 형성된 통가죽 및 그 제조방법’에 대한 특허를 내기도 했다. 요철을 활용해, 가죽에 입체적인 질감을 입히는 기술이다. 그는 “가죽에 아주 미세한 문양을 섬세하게 형상화하려면 상당한 노력과 손재주가 필요하다”며 “공고를 다닐 때 터득한 기술과 졸업 후 잠시 배운 미술공부가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이런 그의 제품은 가격이 제법 나간다. 가죽으로 만든 탁자는 350만원, 가죽가방은 30만~130만원 등이다. 하지만 소형차 값에 달하는 외국 가죽명품에 비하면 훨씬 싸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박 대표는 “가죽을 잘 모르는 소비자라면 상당히 비싸게 느껴질 수 있지만, 진정 가죽을 즐기는 매니어들은 가격을 따지지 않는다”며 “어떤 가죽을 쓰고, 얼마나 정성을 들여 창의적으로 제품을 만들었는지가 명품과 평범한 제품을 가르는 기준”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라”는 말을 꼭 넣어달라고 요청했다.

 “돌아보면 정말 형편없는 인생을 살았다. 지금 잘되고 못되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다 보면 운도 따르고 일도 잘 풀리게 된다. 이런 평범한 진리를 늦은 나이에 깨달은 것이 안타깝다.”

오산=손해용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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