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지 잇단 폐간 … 시는 지금 어디에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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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시의 언어가 광속의 감각에 밀려났다. (중략) 시의 입장에서 보면 독자와 시가 폐쇄되는 어렵고 위험한 상황이다. 이미 시의 가치와 형식이 미래사회의 제단 앞에 은밀히 종언한 것일까.”

 시 전문 계간지 ‘시평’의 편집인이자 주간인 고형렬 시인의 씁쓸한 소회다. 발간 13년 만에 ‘시평’의 종간을 선언하며 한 말이다. 2000년 가을, 아시아의 수많은 시를 소개하는 ‘아시아의 시 네트워크’를 표방하며 창간했지만 재정난에 막혀 결국 발행을 중단키로 했다.

 올 들어 경영난에 휴간·폐간을 선언한 시 전문지는 ‘시평’뿐만이 아니다. 올해로 발간 11년을 맞이한 문학세계사의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도 2013년 가을호(45호)를 마지막으로 휴간을 선언했다.

 시 전문 계간지 ‘시안’도 2013년 가을호(통권61권)를 끝으로 폐간했다. 시인인 고려대 오탁번 명예교수가 1998년 창간해 지난해 봄 세로쓰기로 판형을 바꾸는 등 잡지를 이어가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현실의 벽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전국 단위의 시 전문지는 월간 ‘현대시학’과 계간 ‘시인수첩’ 등만 남게 됐다.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인 이시영 시인은 “올해 휴간이나 폐간을 선언한 잡지들은 그 동안 정선된 안목으로 시를 다뤄왔는데 이들 잡지가 사라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 시의 고사(枯死) 상태를 보여주는 건 아니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시 전문 잡지가 잇따라 발행을 중단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구독자 감소다. 잡지를 사는 독자나 정기 구독자가 없는 상황에서 잡지사와 출판사는 재정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우리 사회의 기형적인 시 소비 행태다. 주요한 시 전문 잡지가 발행을 중단한 것과 달리 성격이 모호한 시 전문 잡지는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다. 백화점 문화센터 등에서도 문학창작 강의는 인기다. 시를 쓰는 사람은 늘어나는데 시를 읽는 사람은 오히려 줄어들고 시집은 팔리지 않는 모순이 빚어지고 있다. 대중과 순수문학의 간극이 그만큼 벌여졌다는 의미다.

 ‘시인세계’는 휴간사에서 “과거와 견줘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많은 시 잡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도처에 시인들이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시집을 제 돈 내고 사서 읽는 독자는 눈에 띄게 줄고, 시 잡지 역시 거의 팔리지 않는다. 시와 시인들은 홀대를 받는데, 시인 인구는 늘고 시 잡지들이 난립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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