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에 살아 남은 유일한 개신 교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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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북경에는 아직도 많은 낡은 교회들이 있다. 어떤 교회는 퇴락 했고 어떤 것은 폐쇄됐지만, 어떤 것은 공회당으로, 사업장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기능을 하고 있는 유일한「프로티스턴트」교회는 전혀 교회같이 보이지 않는다.
이 싸전거리교회는 뒷거리에 위치했는데 기와지붕을 한 20세기 초 동양에 들어온 서양식 2층 건물이었다. 내부엔 나무의자들이 늘어서 있고 강단엔 십자가와 제단이 준비돼 있었다.
강단 옆엔 낡은「피아노」가 한대 놓였는데 60대의 여인이 이것을 치고 있었다.
이 교회는 58년에 중국의 모든 신 교파들의 통합으로 만들어진 기구인 북경신교협회에 속하는 것으로 지난번 문화혁명 발발이래 외국인들에게 폐쇄된 후 처음으로 지난 부활주일에 다시 열리게 된 교회다.
부활절 이후 외국인들은 자유롭게 언제라도 이 교회를 찾을 수 있다. 실상 대부분의 외국 사람들은 일요일에 여기 와서 62세의「인치첸」목사가 인도하는 35분간의 예배를 본다.
「인」씨는 대개 상오 9시 30분에 예배를 시작하는데 이때 모인 교인은 열 사람 남짓, 그것도 외국인이 반수였다.
예배자체는 상당히 간소했으나 감리회 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 설교도 없었다.
또 헌금도 없었다. 대신 예배참가자는 교회 뒤에 놓인 상자에 현금을 해도 상관없었다.
이 상자가 교회의 유일한 유지수단인데 두 목사의 월급을 충당하게 돼 있었다. 예배 뒤엔 「인」씨와도 쉽게 얘기할 수 있었다. 그는 38년 중국에서 신학생이 된 끝에 44년 목사가 됐다고 했다.
그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가 곤경을 거쳤으리란 것은 짐작할 수 있다. 독립투쟁, 49년 이후 교회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새 정권에 대한 적응이 문제였을 것이다.
적대감은 전통적인「마르크시스트」의 기독교에 대한 감정이지만, 그 외에도 중국의 민족주의가 기독교에 적대적인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교회를 재정비하는데 있어 공산주의자들은 중국인사이에 광범하게 퍼져 있는 감정. 곧 소위「서구제국주의」와 기독교를 동일시하는 감정에 호소했다.
처음부터 종교의 자유는 새 정부의 헌법에도 보장됐었다. 신앙은 허용됐으나 전도는 불허됐다. 만약 교회가 존속되면 외국과 관계를 갖지 않고 독자적으로 있어야 했다.
학교·고아원·병원 등 교회에 의해 운영되는 다른 복지기관들은 몰수되고 졸지 선전을 하여 목사·수녀·신부들에 대한 공 분을 일으키게 했다. 재판·추방이 있었으나 피의 숙청은 없었다.
49년 공산정권이 들어섰을 때 3백만의「카톨릭」신자와 1백만의 신교도가 있었다. 현재의 신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훨씬 적은 수임에 틀림없다. 오늘날의 북경 신자 수에 대해 「인」씨는 5백 명 정도로 추산했으나 이들이 모두 교회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문화혁명이 가져 온 하나의 큰 변화는 예배이외의 모든 교회활동이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세례·결혼식·장의 식과 같은 행사가 법률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나「인」씨의 설명에 따르면『사람들이 이미 그런 행사를 원하지 않는 때문에』 과거의 사건이 되었다.

<「뉴요크· 타임스」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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