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에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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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사람을 움직이는 감정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에비」의 관념, 즉 공포의 감정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의 말이다.
공포의 감정을 가장 잘 불러일으키며, 또 그것을 이용할 때 종교며 정치며가 제일 잘 성공을 거두게 된다고 「앙드레·말로」도 보고 있다.
가령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랑의 복음 때문이라기 보다는 지옥에 대한 공포를 가장 잘 불러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에 한 정신신경과 교수가 한국인의 「에비」관념, 즉 한국인들이 느끼는 공포의 대상에 관하여 흥미 있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여기 의하면 어린이나 시골사람들의 공포대상은 「귀신」 「밤」 「동물」등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공포가 연상시켜주는 색채는 언제나 흑색이다. 흑색은 밤과 미지와 폭력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원시인이 가장 두려워했던 게 밤이었다. 밤은 추위와 맹수의 공격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밤은 초월적인 힘을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원시인의 종교의식은 밤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어린이나 시골사람들이 밤을 가장 무서워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런 공포의 대상이 중학생이 되고 도시에 살수록 달라지는 것도 흥미롭다. 조사에 의하면 중학생은 「강도」와 「간첩」과 「깡패」 그리고 「선생님」을 무서워한다고 했다. 그들이 생활에서 직접 당하는 두려움인 것이다.
고교생 이상의 남자들이 사회·경제를 공포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도 납득이 간다.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중학생이 선생을 두려워하고 농촌학생이 사람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이다.
공포는 결국 불합리한 힘에 대해서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밤이 무서운 것도 그것이 온갖 불합리한 신비스러움을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생이나 사람 그 자체가 무서워지는 것은 웬 까닭일까? 알 것도 같은 얘기이다.
그러나 공포는 언제까지나 그냥 공포로만 멎어 있는 것이 아니다. 원래가 공포의 감정은 뇌저에 있는 시상하부의 어느 한 점이 자극되어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바로 이웃에 우뇌의 감정을 자극시키는 점이 있어 공포와 분노는 이웃사촌보다도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령 전장에서 겁에 질린 병사가 어느 한 순간, 갑자기 다시없는 용맹성을 떨치는 병사로 돌변하는 수가 있다. 공포의 감정이 공격의 격이 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오늘의 한국인들이 느끼고 있는 공포의 감정은 그 대상에 대한 공격으로 바뀌어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래서 사회심리학은 이런 감정을 건강한 방향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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