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심은 한국의 얼|백제인 박사 왕인의 위업 (15)|신라인들의 반기|김창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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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앞서 말한 비조 문화를 거쳐 나량 문화에 이르기까지를 전후하여 대두하는 몇 가지 중요한 새 사실을 살펴보고 이 연재물을 매듭지으려 한다.
서기 660년에 나·당 연합군에 패망한 백제를 비롯, 당시 신라·고구려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도일했다. 초빙·망명·이주 등으로 백제는 664년에 선광왕이 난파에 망명한 것을 비롯하여 665년 남녀 4백명이 근강국 신기군에 정착했고 666년에는 2천명이 동국에 정착했다.
675년에는 7백명이 이주했고 685년에는 승녀 23명이 무장야국에 이주했다. 고구려인은 690년에 승지강과 56명이 상강국에 정착, 716년에는 1천7백99명이 무장야국에 옮겨졌으며 신라는 690년에 14명이 태재부를 떠나 무장국서 농사를 지었으며 693년에는 50명이 무장국에 이주, 715년에는 74가구가 미농국에 이주했다. 759년에는 남녀 40명과 승녀 34명이, 660년에는 1백3l명이 각각 무장국에 이주했다. 758년에는 또 1백39명이 이주했었다 (일본 고사기).
이 가운데는 소수의 관료와 승녀들을 빼놓고 거의가 신 기술자와 신 지식인들이었다. 「동대사 금동대불상」창건 당시 주역이었던 국공 마려도 이때에 새로 간 한래인 중의 한사람이었다.
이와 같이 새로운 이주자는 먼저 간 사람들의 기득 세력과 자연 융합 내지 흡수된 것은 뻔한 일이다. 구래인들은 일찍부터 「기술을 자손에 전습」하여 지방에 정착한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중앙의 상급 관리가 되는 것보다는 단지 철공 순공 동공 금작 등 제작에 종사하며 시골에 본거를 두고 직접 생산자가 되었던 것이다. 오히려 근강조 이래의 정부 관리로서 지도자가 된 것은 신래들이 많았다. 구래인들은 그 후예들과 더불어 지방에 세력을 펼쳐 호족으로서 성장해 가며 민중과 직접 접촉하여 지방 문화·생업 발전에도 기여하는바 컸었다.
특히 일반 민중에 가담하여 활약한 법상종의 도소와 행기대승정 (왕인 혈통들)의 대민 전도 사업은 율령 정부에는 눈 안의 가시였으나 관료의 수탈에 고통받는 민중에게는 큰 빛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많은 토건 사업으로 민중의 생활고를 덜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여 올바로 선도하여 주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율령 정부에 내한 경고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율령적 지배 질서가 강화되면서 전에는 한래인을 기내 및 그 주변과 서국의 주요한 지방에 거주시키던 것을 천무·지통조 (7세기 말엽) 이후에는 먼 곳으로 이주시키는 예가 많아졌다. 천무조 이후에는 백제의 남녀 21명을 무장국에 (「천무천황기」4년조), 신라인 1백48명은 하야국에 (「특통천황기」원년조), 고려인 56명은 상강국에 (동상) 등과 같이 관동 지방에 거주시켰다 (속일본기).
물론 한래인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변지를 개척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다는 것은 뻔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한 태도는 9세기에 들어서 더욱 노골화됐다. 9세기초에는 신라에서 간 사람 중에는 상인들도 끼여 있었는데 육오 등 미개 지방에 보냈고, 820년 (홍인 11년)에는 원강·준하에 배치된 신라인들이 극단적인 차별과 탄압에 대한 격분을 이기지 못해 드디어 반란을 일으켜 조정에 도전했던 것이다 (좌백유청 「역사학 연구」).
이 사건은 외래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신라인에게 극단의 차별과 탄압으로 대한다는 것은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 장차 다른 외래인에게도 같은 운명이 올 것이라고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신라계 한인들의 항쟁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 정의를 위하여 굴하지 않고 맨 주먹일지라도 싸우는 고귀한 투지와 용맹성은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역사적 증언이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일본 고대에 있어서 주인 체제를 중심으로 한 한인들은 미개한 땅에 문맹을 퇴치하여 문화를 개발하고 기술을 보급하여 산업을 진작케 했으며 일본 고대 국가 형성과 문화 발전에 창조적 역할을 했음을 대충 설명했다.
아울러 백제의 불교 이직과 이어서 일본 문화의 황금 시대인 비조 문화와 나량 문화의 창건에 참여했던 많은 기술공은 물론 그 주도적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도 왕인의 후예들이라는 것을 밝혔던 것이다. 진실로 위대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심어놓은 「한국의 얼」은 이것으로 전부가 아니오, 끝난 것도 아니다. 이 연재는 이제 겨우 디딤돌을 놓은데 불과하다.
그들의 유적은 이밖에도 많은 사연을 간직한 채 일본 도처에서 모국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조상이 남기고 간 유적은 우리 민족의 재산이다. 어찌 소홀히 거둘 손가.
요는 한·일간의 고대 관계사를 정확하게 규명·인식하지 않는 한 현대사를 올바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은 명약 관화한 일이다.
필자가 여기에 조그마한 글을 발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었으면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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