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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향 저널리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미국의 「타임」지는 일본의 신문들을 혹평한 일이 있다. 1960년6월20일호. 당시 일본의 좌익청년들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방일을 반대하는 폭력 「데모」로 세상을 어수선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때의 혼란에 신문은 과연 사회적 책임을 다했느냐는 회의를 「타임」지는 나타낸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 신문의 대부분은…돈을 가진 보수적인 인물들이 소유하고 있다. 이들은 내심으로 보수당의 주장에 동조하면서도 돈벌이에 만 큰 관심을 쏟으며, 「저널리즘」에 있어서는 거세된 환관이나 다름없다. 이들은 편집국에 있는 수백 명의 자유주의적 사상을 가진 젊은 「인텔리」들에게 문자 그대로 자기의 신문을 떠맡겨 놓았다.』
「타임」지의 비판 일절. 그때 유독 「요미우리」(독매)의 「쇼오리끼」(정력)사장만은 「타임」지 사장 앞으로 단호한 항의문을 냈다.
『돈벌이에만 관심을 갖고 거세된 환관으로서 신문을 좌익에 맡겨놓았다는 주장은 나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다.』
1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일본의 바로 그 「요미우리」신문은 똑같은 비판을 우리에게서 받게 되었다. 과거는 어찌되었건 이제는 서로 이해하려는 선린 관계의 한국에 대해 어색하게도 『남,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은 것은 편견을 넘어 악의에 가득 차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국 자체에 한한 어떤 견해의 피력이 아니고, 북한을 찬양하는 주변의 효과로 구사된 표현이기 때문이다.
별책 「주간독매」에 『주체의 나라-조선』을 집필한 문제의 필자 「다까끼」(고목건부) 는 60대의 일본서는 제법 「노련」한 「저널리스트」이다. 그러나 그 「노련」의 눈이 편견과 흥분과 왜곡에 넘친, 용렬을 넘지 못한 것이라면 「인생적막」감 마저 던져준다. 그는 언젠가 북한 기행문에서 이런 터무니없는 신화를 인용부호도 없이 서술한 적이 있었다. 『한국 동난 중에 다리 한 짝을 잃은 북한의 어느 노동자는 「주체 사상」에 투철한 동료들이 헌정한 뼈를 같아, 그것으로 어떻게 처치를 했더니 말짱히 완전 인으로 회복되었다』는 내용. 과연 그런 것이 「저널리스트」의 「르포르타지」로 온건히 받아들여 질 수도 있는 것인지. 새삼 「저널리즘」의 ABC를 생각하게 한다.
근년에 『일본인과「유대」인』이란 저서로 화제가 되었던 「유대」인 저술가 「이사야·벤다산」은 일본인의 그런 사고 속성을 「전원 일치」적 사고라고 비웃은 일도 있다. 『전원 일치의 결정은 무효』라는 것이 「벤다산」의 사고이다. 왜냐하면 그런 일회적인 사고는 『편견이나 흥분 아니면 협력의 소산』이기 때문에.
분명한 것은 북한 체제에 대한 일본인의 견해는 자유다. 다만 그 견해를 합리화하기 위해 한국에 대해 일그러진 눈을 뜨고 비방을 일삼는 것은 적어도 「저널리즘」의 양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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