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0)제26화 경무대 사계 여록 내가 아는 이 박사(16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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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당파 초월한 조각>
이 박사가 김성수를 총리로 추천한 나의 끈질긴 주장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조민당 당수 조만식을 고집한데는 또 다른 숨은 사실이 있다.
평양의 조만식과 서울의 이 박사 사이에는 끊임없는 연락이 있었다. 서신왕래만 해도 세 번이나 있었다. 그때의 평양과 서울 사이를 이어준 사람은 고 안중근 의사의 유족의 한사람이었다.
공산당은 고당에게 소위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주어 포섭하려고 했으나 그는 거절하고 독자적으로 조선민주당을 세워 반탁을 지휘한 북한의 민주영도자였다. 그는 서신을 통해서 공산정치의 실정을 폭로하고 이 박사의 영도노선에 따를 것을 명시했었다. 그는 공산주의와는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고 이 박사의 대 유엔 전략만이 통일에의 길이란 걸 역설했다.
이 박사는 어떻게 해서라도 조만식을 남쪽으로 구출해야되고 그와 제휴하는 것이 통일독립의 길이라고 믿었었다. 그가 남쪽으로 빠져 나올 수 없는 인물이라는 이유로 주변의 공세가 집중하자 끝내 이윤영을 총리로 지명하는 것을 보면 조만식에 대한 이 박사의 동지애가 얼마만큼 깊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윤영은 감리교목사로서 조민당의 부당수였다. 만일 이 박사가 나의 의견을 들어 김성수를 택했다면 한국의 정치풍토나 판도가 크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조각은 총리문제 외에도 순탄하지 않았다. 내무가 나에게 맡겨지리라고는 상상해 보지도 않았었다. 나는 국회에서 국방·외무 분과위원장을 하고 있었고 국회 안의 공산주의와 싸워야 했다.
그러나 이 박사에게 보내진 다른 이들의 추천명단에는 외무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외무에 백락준을 추천하고, 내무에는 구두로도 여러 번 장택상을 시켜야 한다고 우겨댔었다. 장택상은 군정에서 수도청장을 지냈었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이 박사를 도왔었다.
그러나 국회에서는 군정에서 일하던 사람을 일체 내각에 넣지 말라는 건의를 하고 일반의 진정도 그러하니 정작 조각에 들어가자 장택상은 어렵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이 박사에게 창낭이 하지에게 맹종하지 않고 반탁운동이나 민주의원, 미소공위 반대에 협조해준 일과 그 때문에 세 번이나 암살의 위험을 겪었다는 걸 들어 내각에 넣어 줄 것을 간청했다. 비로소 이 박사도 나의 간청에 즉시로 장택상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내무가 아니라 외무였다. 나는 내무에는 자신이 없었다. 경험이 전무하고 성격적으로 안 맞을 뿐 아니라 그 방면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못하겠다고 했으나 이 박사는 네가 애국자라면 나라가 맡겨주는 일을 뭐든 해야지 하고 떠맡겼다.
국방에 이범석을 선택한 것은 이 박사의 실수였다. 그보다 선배장군인 이청천을 무임소에 돌리는 결과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 때문에 이범석과 나는 같이 이청천 장군을 방문하고 간곡히 양해를 구했었다.
김성수의 재무거절로 상심한 이 박사에게 김도연이 추천됐다. 그 이상의 적임자는 없었다. 그러나 이 박사가 상산을 기용한 태도 속에 우리는 이 박사가 얼마나 사심이나 당파를 초월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김도연도 나와 같이 일본·미주로부터 이 박사를 존경하던 터였지만 그는 학업에 바빠서 이 박사의 광복활동에는 직접 호응하거나 협조하지 않았었고, 그는 흥사단원 이었다. 흥사단과 이 박사와의 관계는 이미 미주의 교민 세계에서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박사는 본래 흥사단에 대해서는 감정적인 생각을 갖지 않고 있었다. 김도연의 기용은 그러한 그의 일상태도를 증명하는 것이다. 특히 조각에 대한 그의 생각에는 정파라든가 애증을 넘어서 나라를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실력이 문제였다.
그러한 이 박사의 신조와 고집이었기 때문에 외부의 어떠한 압력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미국의 후원으로 독립을 본 대한민국의 첫 조각에 미군정당국의 단 한마디의 말도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는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후에 조병옥을 순회전권대사로 임명한 것도 그러한 국가적 권위와 신념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나라를 위해서는 사적인 애증이나 이해를 떠나야 된다는 생각이 철저했다.
첫 조각에 있어 이 박사가 가장 중요시 한 것은 임영신이 「유엔」과 미국을 통해 이룩한 공로에 대한 보답문제였다. 그는 여러 번 전보를 치고 임영신의 귀국을 독촉했었고 심지어는 그녀의 귀국 때까지 조각을 늦출 의사까지 갖고 있었다.
『유엔 에서 독립을 얻어낼 때까지 돌아오지 않겠다』는 임영신의 편지가 그에게는 한시도 잊을 수 없게 눈물겨운 일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임영신에게 자리를 주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의도라기보다도 국가적인 당위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모르고 임영신에게 내정된 상공자리를 두고 넘겨 다 보거나 탐탁찮게 생각하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임영신이 귀국하자 이 박사는 그녀를 거족적으로 환영하기 위하여 의장대와 군악대를 내보내고 비행장에서 경무대까지 시민을 동원했다. 그러나 이 박사의 조각기준은 공명보다도 능력이었고 정파보다는 애국심이었다. <계속> [제자 윤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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