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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전쟁도, 평화도 . 커피는 세계사의 축소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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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유럽인은 17세기 중반에 커피라는 신세계를 접했다. 1700년 무렵 영국 런던에만 2000개가 넘는 커피하우스가 영업했다. 당시 해운업계 사람들의 사랑방으로 유명했던 런던 로이드 커피하우스. [사진 을유문화사]

매혹과 잔혹의 커피사
마크 펜더그라스트 지음
정미나 옮김, 을유문화사
642쪽, 2만3000원

지금 내 앞에 한 잔의 과테말라 안티과 커피가 놓여 있다. 검은 액체에서 피어나는 하얀 김과 함께 숲이 타는 듯한 스모크 향이 짙게 흐른다. 가슴이 설렌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원시림에서 하늘 높이 자란 나무를 태운 연기에서 묻어나는 향이 이럴까.

 입안에 한 모금 넣었다. 혀 위를 묵직하게 구르더니 상큼한 신맛이 입 안을 가득 채운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머릿속에서 이제야 피가 돌아가기 시작한 느낌이다. 이윽고 매끈하게 목을 넘어간다. 앙증맞은 앵두를 넘기는 기분이랄까. 뒤따라 굵은 첫 맛과 쌉쌀한 뒷맛이 줄이어 입 안에 확 퍼진다. 타오르는 듯한 황토의 진중함을 떠올리게 하는 맛이다. 쉽사리 잊기 힘든 향과 감촉, 그리고 맛의 기억이다. 한 모금, 두 모금 커피가 줄수록 아쉬움이 쌓여 간다.

 미국 전문저술가인 지은이는 이러한 오묘한 맛과 멋은 물론 기원과 확산의 역사, 생산과정에 이르기까지 커피의 모든 것을 다룬다. 역사를 원두 삼아 뽑아낸 커피의 인문학이다.

 우선 생산 과정을 보자. 커피 원료는 커피콩이다. 머나먼 제3세계 나라의 평원이나 산기슭에서 자라 여기까지 온 ‘식물’이다. 농부 또는 농업노동자가 재배해 수확한 귀한 ‘농산물’이다. 수확의 기쁨과 하루 3달러의 품삯을 얻기 위해 농부들은 못이 박힌 손으로 일일이 씨 뿌리기, 묘목 옮겨심기, 가지치기, 비료주기, 살충제 뿌리기(물론, 유기농은 제외), 물 대주기 등을 해야 한다. 길고도 복잡한 과정이다.

전설에 따르면 에티오피아의 칼디라는 염소지기가 염소들이 커피 열매를 먹고 신이 나서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커피의 즐거움을 발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일꾼들이 동원돼 햇빛에 말린 커피콩의 과육과 점액질을 제거해야 ‘가공 농산물’인 생두를 얻을 수 있다. 이를 말려 내피와 은피를 제거하면 비로소 국제적 이동이 가장 활발한 ‘교역상품’인 원두가 된다. 배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간 원두는 꼼꼼하면서도 정교한 원두 볶기, 분쇄, 추출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한 잔의 검은 ‘음료’가 된다.

 이러한 커피는 17세기 이후 인류 역사와 함께했으며, 상당히 자주 역사를 이끌기도 했다는 게 지은이의 강조점이다. 동아프리카 에티오피아 고원이 고향인 커피는 홍해를 가로질러 아라비아 반도로 건너가 무슬림(이슬람교도) 세계의 기호품이 됐다. 이 제품이 서구에 전래된 시기와 과정은 역사에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됐다. 1683년 오스트리아 빈을 포위 공격하던 오스만튀르크 군대가 철수하면서 두고 간 원두 500자루가 기원이다.

 사람들이 낙타 사료로 여겨 불태우려 하자 튀르크군 진영을 드나들며 스파이 임무를 수행하던 콜시츠키라는 사람이 말렸다. 커피의 맛과 만드는 법을 알았던 그는 노획 원두를 바탕으로 바로 그 해 ‘푸른 병 아래의 집(Hof zur Blauen Flasche)’이라는 이름의 커피숍을 빈에 열었다. 서구 최초의 ‘다방’이다.

 우유를 탄 부드러운 커피도 개발했다. 카페 라테의 원형이 아닌가. 당시 커피는 너무도 인기가 있어 순식간에 전 유럽에 퍼졌다고 한다. 오스만튀르크는 빈을 점령하지 못했지만 서구에 원두를 팔아 그에 못지않은 경제적 이득을 보지 않았을까. 그 뒤 서구는 커피를 남미와 아프리카, 심지어 동남아시아 식민지에서 상업적으로 재배함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다. 이에 따라 커피는 전 세계에 걸쳐 재배되면서 국제교역의 주요 상품으로 등극했다. 커피에는 농부 말고도 선원, 상인의 땀도 배어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커피는 남미 엘살바도르 내란 종식에 기여하기도 했다. 1980년대 커피 산지인 이 나라는 좌우내전으로 황폐화했으며 8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 그러자 미국 샌프란시스코 소재 ‘이웃과 이웃’이라는 사회운동단체가 엘살바도르산 원두를 사용하는 폴거스 등 대형 브랜드 커피 불매운동을 펼쳤다. 부두 노동자들도 여기에 호응해 엘살바도르산 커피의 하역을 거부했다.

 그러자 미국의 메이저 커피회사들이 견디다 못해 국무부를 설득해 엘살바도르 평화협상을 성사시켰다. 내전은 1992년 초에 끝났고 엘살바도르 국민의 삶과 함께 커피 거래도 다시 정상을 되찾았다. 지은이는 이러한 커피 수다로 두툼한 책을 가득 채운다. 이야기들이 크레마(황금색 거품)가 좋은 한 잔의 에소프레소 도피오처럼 진국이다.

채인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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