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 전시하의 정치 파동 ⑤ <서민호 사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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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개헌파동이 한창 고조될 무렵에 발생한 세칭 서민호 의원 사건은 국회에서 열세로 궁지에 몰렸던 정부에는 절호의 반격의 기회를 마련해 준 셈이었다. 4월 25일에 현역 육군 대위를 사살한 혐의로 구속됐던 서민호 의원은 국회의 석방결의로 풀려 나와 있다가 5월 26일에 계엄이 선포된 날 바로 다시 구속됐다. 이 사건은 여야의 대립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고 국회에서의 서민호 의원 석방 결의안 가결은 결과적으로 정부로 하여금 비상계엄선포의 한 구실로 삼게 했다. 국회의원이 현역 육군 장교를 사살한 이 사건은 행위의 정당방위 여부는 어쨌든 간에 때가 전시인 만큼 군이나 일반에 비상한 충격을 준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정부측이 이 사건을 큰 정치문제로 삼고 나선 것은 서민호 의원이 거창 사건·국민 방위군 사건 등을 통해 대 정부 공격에 앞장섰고 내각책임제 개헌도 적극 추진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미행한 서 대위, 문틈으로 엿봐>
52년 4월 24일 순천 시내 평화여관에서 발생한 이 사건의 발단은 극히 단순했다.
즉 국회 내무분과위원장이던 서민호 의원은 국회의 결의로 전남지방의 지방선거 상황을 시찰하러 순천으로 가 4월 24일 평화여관에서 지방유지들과 주석을 베풀고 있는데 전남 병사구 사령부 파견 군의관인 서창선 대위가 서 의원 일행의 사석을 문틈으로 들여다보다가 시비가 붙어 급기야는 그런 어마어마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건발단은 단순했지만, 사건 원인이나 동기 등에 관해서는 쌍방의 주장이나 해석이 정반대로 맞섰다. 먼저 정부견해라고 볼 수 있는 군재의 검찰 기소장 내용.

<피고 서민호는 김처중·서원룡 등을 대동하고 4월 23일 부산을 출발, 여수를 경유, 24일 순천에 도착하여 동일 하오 7시 30분 영동 평화관 객실에서 친교 있는 한상휴 우체국장 등 지방유지 9명과 회음 중 31육군병원 소속 전남 병사구 사령부 파견 군의관 서창선 대위(28)가 회음실 남쪽 문밖에서 정립하여 유리창으로 동실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을 경호원 김처중이 「수하」를 하다가 서 피고인도 언쟁장소에 이르자 노기로 『누구냐』면서 『나는 서민호다. 군인이면 군인이지 왜 요리집에 와서 떠드느냐』고 한 후 피차간 언사가 불손해지자 서원룡(주="서의원" 장남)이 서창선의 얼굴을 향해 박치기를 하자 그는 장시 혼수상태에 빠져 비틀거리며 『아이구 내 이가 빠졌다』면서 뒷걸음 3, 4보 치다 권총을 빼들고 실내로 들어가 벽에 접한 방바닥에 공포 1발을 발사한 나오자 옆 복도에 서있던 피고는 동가 취사장 앞 마룻방으로 들어서 있다가 서창선이가 앞마당에 내려서 대문을 돌아가는 보았음에도 피고인은 그 후방 3m지점에서 휴대한 「모젤」권총으로 동인의 상체 배부를 2발을 연사하여 적중하자 동인이 뒤돌아서는 찰나에 또 발사하여 배부 우측 제11 늑골 하지 대퇴 굴측부 및 흉부 제2 늑간부에 각 명중시켜 동소에서 즉사케 했다>
검찰의 기소장에 의하면 서민호 의원이 대문으로 나가는 서창선 대위를 뒤에서 쏘아 죽인 것으로 돼있다.
그러나 서 의원이나 변호인들은 서 의원은 서대위가 수차 총을 쏘았고 생명의 위험을 느껴 사살한 전형적인 정당방위라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먼저 2발 쏘고 겨누는걸 사살>
▲서민호씨(당시 국회의원·현 국토통일원 고문·68) <내가 지방선거 시찰을 위해 출장 가려고 하니 엄상섭 의원 등이 거창 사건과 방위군 사건으로 이박사의 미움을 받고있으니 몸조심하라고 해요.
여수에서 시국강연을 끝내고 순천으로 가려고 하니 경찰이 치안이 확보 안됐으니 안가는 게 좋겠다고 합디다. 순천으로 가는데 내 뒤에 「지프」 한대가 늘 따라와요. 그 차에는 부산에서 나를 미행해온 괴한과 나중에 알았지만 문제의 서창선 대위가 타고 있었어요.
순천에 온 24일 저녁 평화관이란 음식점에서 지방유지들과 식사를 같이 했어요. 식사도중 옆방에 있던 김처중 호위순경이 뛰어 나가면서 『누구냐』고 고함칩디다. 서 대위가 문틈으로 들여다보는 것을 알고 나갔다고 해요.
내 아들과 김 순경이 서 대위와 시비가 붙었어요. 군인은 방밖에서 『서민호 나오라』고 해요. 내가 나가서 젊은 군인이 체통 없이 구느냐 나무랐더니 내 욕을 합디다. 나의 아들이 자기 아버지 욕하는 것을 듣고 화가나 박치기하고 한 대 갈겼어요. 서 대위가 몇 발 뒷걸음치더니 권총을 빼들고 한 방 쏩디다. 나는 뒷걸음으로 부엌 옆으로 들어가 숨어 있는데 그가 나를 찾아 다시 2발을 쏘고 또 쏘려고 겨눕디다. 나는 본능적으로 호신용으로 갖고 있던 권총을 빼들고 쏘았지요.>
사건이 나자 서 의원은 경찰과 검찰에 알리고 25일에 순천지청에 자진 출두했다. 서 의원은 사건의 진상을 진술하고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서 의원 행위가 정당방위가 될 수 없다고 즉각 구속했다.
이 사건이 나자 순천시내에는 곳곳에 헌병들이 삼엄한 경비를 펴고 사건을 조사한다고 검찰 3개반 경찰 3개반 해병대 3개반 미군관계 특무대 국회 조사반 등 13개 조사위가 내려 와 순천시내의 분위기는 무척 어수선했다.
다음은 국회조사단의 증언.
▲유홍씨(당시 국회 조사위원장·현 사업·73)<서민호 의원이 구속되자 국회는 김정기·조정훈·조순·김광준·이석기 의원과 나를 조사위원으로 보냈어요. 순천에 가보니 시내 곳곳에 헌병들이 기관총을 들고 삼엄한 경계를 하고 분위기가 험합디다. 서 의원 사건을 조사한다고 13개 조사반이 몰려왔다는 거에요.< p>

<국회 조사단, 시체 사진 못 찍어>
서 의원과 같이 식사를 했다는 우체국장 등 12명을 만나 증언을 들었는데 다같이 서 의원 말과 같이 정당방위에 틀림없다고 해요. 총알이 지나간 각도와 중인들의 증언에 의해 정당방위라는 확증이 갑디다. 관계기관에 서 대위가 맞은 총탄각도 등을 증거로 하려고 시체사진을 찍겠다고 했더니 시체는 화장하고 없다고 하면서 끝내 보여주지 않습디다.
나는 2일 동안 조사를 끝내고 분위기가 하도 험해 출발일자 보다 하루 앞당겨 여수로 해서 부산으로 돌아 왔습니다. 경찰인가 헌병대인가에서 나의 조사기록을 뺏으려고 추적했으나 배가 떠난 뒤라 허탕을 쳤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어요.>
국회는 조사위의 조사 등을 토대로 서 의원의 정당방위를 인정하고 5월 14일 석방 결의안을 94대 0으로 의결하고 법원에 석방을 요구했다. 사건을 맡은 안윤출 판사가 석방을 결정하자 2천여 명의 「데모」대원들이 국회와 법원에 난입하는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법원의 석방결정으로 풀려 나와 있던 서 의원은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즉각 재 구속되어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다음은 서 의원 군재 관계자들의 증언. ▲최경록씨(당시 국방부 제1국장=소장·현 주영대사·52·주=일시 귀국 때 회견) <서민호 의원이 구속되어 군재에서 재판 받게 됐는데 내가 재판장이 됐어요. 당시 군인 외에 김두일 허진씨 등 판사들이 심판관이 개정하는 날『오전 중에 심리를 끝마치고 오후에 사형선고를 하라』는 내용의 정부 고위층 「메모」가 나에게 전달됐어요. 나는 서민호 군인을 사살한 것은 틀림없지만 정당방위 여부 모든 법에 따라 심판해야 하며 더우기 세계의 이목이 쏠린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게 안 된다고 했어요. 재판은 한달 가량 끌었는데 그 동안 『승진시켜 주겠다』는 「메모」도 두 번이나 오고 나를 회유하려 했으나 묵살했습니다.
결심공판을 하루 앞두고 나를 재판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재판장 시켜 사형선고를 내리게 했어요.>

<재판장 바꿔 정치재판 인상도>
▲박동균씨(당시 육군 군의학교장=준장·예비역 소장·현 사업·54)<최경록 장군이 재판장일 때 내가 차석으로 있다가 그분이 그만두자 재판장이 됐습니다. 심판관은 모두 7명이었고 검찰 측은 권오병 검사와 또 한사람이 간여했습니다. 검찰은 서 의원의 행위를 살인행위로 기소했고 피고 정당방위라고 주장합디다.
재판부는 현장검증을 하고 쌍방이 내 세운 증인의 증언도 다 들었어요. 피고 측 증인은 서 대위가 서 의원에게 총을 겨누어 위급했기 때문에 쏜 것이라고 주장하고, 검찰 측 증인은 대문을 나가는 것을 서 의원이 뒤에서 쏘았다고 해요.
총 맞은 서 대위 시체가 없고 보니 재판부는 증거채택에 애를 먹었어요. 재판부는 서 대위가 사건을 유발한 것은 사실이나 서 의원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는데도 피하지 않고 총을 쏜 것은 정당방위가 되지 않는다고 보고 살인행위로 단정,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당시 정국 양상이나 서 의원이 반 이 박사 세력의 중요인물이란 점에서 정치재판이란 말도 있었으나 당시 심판부는 누구의 압력도 받지 않고 소신껏 재판했습니다.>
이 사건은 군법회의 재심에서 징역 8년이 선고 됐다가 53년 계엄해제와 더불어 부산지법으로 이송됐고 55년 대법원에 의해 징역 8년형 확정으로 매듭지어졌다. 당시 이 사건을 맡은 변호인의 증언.
▲정구영씨 (당시 변호사·전 공화당 의장·77) <첫 군재에서 간여 권오병·김달기 두 검사는 서 의원이 피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피하지 않고 응사한 것은 살인행위라고 주장합디다.
나는 모든 증거에 비추어 이 사건은 전형적인 정당방위라고 주장했어요. 재판부도 나의 변론이 정당하다는 심증이 가는 것 같습디다. 그러다가 돌연 최경록 재판장이 갈리고 박동균씨가 재판장이 됐어요. 나는 무슨 곡절이 있구나 생각했어요.
새로운 재판부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재심을 신청한 결과 8년형이 선고됐다가 계엄이 해제되자 군재는 엉뚱하게도 부산지법으로 사건을 이송한다는 결정을 합디다.
부산지법에 넘어오자 양회경 판사가 재판장이 되고 강안희·송명관 판사가 배석 판사로 재판부가 구성됐어요. 내가 민재에서의 변론을 위해 변론 원고작성에 1개월, 원고 교정에 1개월, 암송에 1개월 걸린 내 평생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건이었습니다. 나는 최후 변론에서 『나는 법원에 들어서면 경건한 마음으로 경의를 표하는 사람이고 법관 여러분에게도 항상 경의를 표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재판한다는 존엄한 법관이기 때문이고, 법관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법관 여러분, 법원은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란 걸 명심해 주시오. 오늘날 이 나라 민주주의가 엄존하느냐 소멸하느냐는 오로지 법관 여러분의 어깨에 달려있습니다』고 말하고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읍니다.
그리고 서울와 있으니 2주 후에 무죄가 선고 됐다고 합디다.
그러나 다시 검찰의 공소로 대구고법에 넘어갔고 또 검사와 피고 측의 상고로 대법원에 계류되는 등 복잡한 과정을 밟아 대구고법의 공소 기각 결정이 확정되는 바람에 군재에서 선고한 8년형이 확정된 겁니다.>
◆주요일지 (1952년 2월 13· 14· 15·16일)
※2월 13일 ▲휴전회담, 협정조인 후 2개월 내에 포로교환 완료 합의 ▲「튀니지」에서 큰 폭동 발생.
※2월 14일 ▲동부전선의 문등리 계곡서 격전 ▲ 태국에 비상령▲ 제6회 동계 「올림픽」대회, 「오슬로」에서 개최.
※2월 15일 ▲한국 공군, 사리원 폭격 ▲한일정상회담 제1차 회담 개최.
※2월 16일 ▲적 「제트」기 3대 격추 ▲휴전회담, 중립국 감시기구 문제로 교착 ▲국회,괴벽보 사건 진상 조사위 구성 가결 ▲이 대통령, 유권자들의 의원 소환요구는 부당하지 않다는 담화발표 ▲한일회담 2차 회의 의제 5항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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