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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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5월의 시」에서 잠깐씩 언급한 일이 있는 두 젊은 시인이 이번 달에는 각기 상당량의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박제천 씨는『허수아비가』25편(현대시학)을, 이성부 씨는『저 바위도 입을 열어』등 5편(창작과 비평)과『더 많은 사람들』등 2편(시문학)을 썼다. 같이 정열적이면서도 이 두 시인처럼 다론 시인은 드물 것이다. <버림><보이지 않음><없음>의 상황은 박제천 시의 핵심을 이루고있다. 『허수아비가』 첫 시부터 마지막 시까지 25편 거의 모두가 이 <보이지 않음>으로 채색되어 있다. 그러나 시인이 행복하다고 소리쳤을 때 행복이외의 것도 읽는 것이 시를 읽는 커다란 행복이다. 우리는 박제천의<없음>이 무의 세계가 아니라, 잠자는 아내가 보이는 밤, 혹은 늙은 여류의 창 소리가 안개와 환치되는 그런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그러면서도 정열적으로 무엇인가 버리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또 버리는 「나」의 세계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장탄식도 율동적으로 뜨는 신화의 일면도 지니고 있고 현세에 묶여있는 자의 허세의 일면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것들은 그래도 잘 결합되어 단순하면서도 빤하지 않고 빠르되 급하지 않는 매력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의 시에는 울음이 많이 있어도 아픔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어느 것을 예로 들어도 좋지만, 짧은 시 하나를 본보기로 들어보자.
나의 기도는 생각나는 대로다 나의 기도는 끝맺음이 져지지 않는다 나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의 기도가 이뤄질 때까지 날마다 나는 기도를 한다 나의 기도가 이뤄지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나에겐 다른 일이 없다 날마다 기도하기 위해 기도하기도 한다. (『그 열 여섯』)<날마다 기도하기 위해 기도한다>같은 상황은 이상의 정신세계와 흡사한 듯 하면서도 사실 아주 다른 세계이다. 이상의 조소나 자조가 없다. 박제천의「나」는 분위기를 위해 등장되는 감을 준다.
그는 이미 주제만 주어지면 발전시키거나 변주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 머지않아 그의 시속에서 진짜 그의 생을 만나게 될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시속에서의「나」가 이성부 씨의 시처럼 명확히 드러나는 시는 드물 것이다. 분노하는 「나」, 괴로워하는「나」, 씩씩하게 싸우는「나」등등 그의 시는 일관된 시적 분신을 가지고 있다.
한나라가 다시 살고 다시
어두워지는 까닭은
나 때문이다 아직도 나 속에 머물고 있는
광주여, 성급한 목소리로 너무 말해서
바짝 말라 찌들어지고
몇 달만에 와 보면 봄에 살이 찐
부었는지 아름다워졌는지 혹은 깊이 병들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고향, 만나면 쩔쩔매는
고향, 겁에 질린 마음을 가지고도
뒤돌아 큰소리로 외치는 노예, 넘치는 오기
한사람이 구름 하나가 나를 불러
왼 종일 기차를 타고 내려오게 하는 곳
기대와 무너짐, 용기와 패배,
잠, 그대의 잠만 살아 있는 곳 오 광주여
(『광주』)
그의「나」는 언제나 옳고 그의「나」는 힘차게 싸우던가 억울하게 고통을 받고 있다. 혹은 잠시 쉬는「나」를 힐책한다. 그리고「내」가 대하는 대상은 늘 약하거나 불쌍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시가 건강한「리듬」을 가지고 있고「이미지」와「이미지」의 힘있는 배합, 무정부주의의 전반부 같은 그의 정열(사실 모든 이념이나 사상을 전 후반으로 나눌 수 있다면 무정부주의의 전반부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으리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에서 부피를 잘 느끼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나」자체의 고뇌가 없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보면 그는 자기의 분신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너무 학대하는 것 같기도 하다.
박제천이 극도로 자신을 무 화시키고 이성부가 철저하게 자신을 내세우는데 반해 박재삼의「나」는 사소설적인 분신을 갖고 있다.
천구들이 와
웃고 떠들어 쌓던
그 자리가 말갛게 가시어지자
호젓이 물결에 밀린
빛나는 조약돌 하나
새로이 내 몸에는
정적의 병만 처져
나는 그것을 어루만질
수밖에 없다.
또한 그러는 것을 낙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정적의 병만 처져』·월간문학)
이 글 첫머리에 언급한 바 있지만, 시인이 행복하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고, 아름답다고 해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시인이 영원한 침묵이라고 할 때 그 침묵에는 소리가 있고 그림자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박재삼 씨가<또한 그러는 것을 낙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고 할 때 사실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자신을 발견한다. 그만큼 너무 정직하다.
어떻게 보면 높은 경지요 어떻게 보면 인간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시인으로서 겪지 않을 수 없는「큰 병」에 대한 예비 검 속 같기도 하다.
우리 나라 시인들의「나」는 대개 이 세 시인의「나」와 같은 자리에 있거나 혹은 이들 사이사이에서 있을 것이다. 시인의 분신으로서의「나」는 언제나 이미 주어진 위치를 일탈할 것을 갈구한다.
사실 월평자의 입장에서 필자는 이 세 시인에게 다른 방향으로의 전이를 암시했다.
그러나 결국 이미 가고 있는 방향으로 극단까지 끌고 나가 다른「나」들을 안에 포함하는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위의 세 시인의「나」를 합해 셋으로 나누면 참담한 우등생밖에 담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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