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발표"…긴장한 눈·귀-남북공동성명이 나오던 날의 시민들 표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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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온 국민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큰 발표에 놀라고 흥분하고 감격하고 기대하는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4일 상오 10시 중대발표가 있다는 예고에 따라「텔리비젼」과 「라디오」앞에 눈과 귀를 모은 온 국민은 서울∼평양에서 동시 발표된 남북공동성명의 한 귀절마다 가벼운 흥분을 느끼고 마침내 역사의 마디에서 올 것이 왔다는 것을 기대로써 받아들였다. 이날 서울 시내 각 관청을 비롯, 다방가에서는 아침한때 중대발표가 무엇일까 하는 화제가 오갔는데 10시 정각 공동성명이 발표되자 처음엔 전혀 뜻밖이라는 표정-. 특히 이후락 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 김일성과도 만났다는 것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처음 선뜻 믿지 않다가 한결같이 그의 담력에 감탄하기도 했고, 북쪽의 박성철이 서울에 왔었다는 것에는『정말 놀랐다』는 표정으로 어리둥절했다. 상점·이발소 등에서는 발표가 중계되는 동안 모두 일손을 놓고 돌발적 무력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남북 조절위원회를 두고 서울∼평양간에 직통전화를 가설한다는 대목에선 모두 큰 변화를 실감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민들은 통일을 향한 큰 변화이며 진전이지만 아직은 낙관할 수 없다는 차분한 이성으로 되돌아갔다.

<기획원>
태완선 경제기획원 장관은 이날 상오 10시부터 6월중 경제동향에 관한 예비「브리핑」을 듣다가 남북관계발표가 시작되자『이것이 더 큰 문제』라고 「브리핑」을 중단시킨 다음 발표가 끝날때까지 관계국장들과 함께 TV를 시청했다.
태장관은 발표가 끝나자『빅·이슈!』라고 말하면서 참석한 국장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 고 의견을 묻기도 했다고-.

<내무부>모두 일손 놓고
○…김현옥 내무부장관은 4일 상오8시 국무총리 공관에서 조찬회를 마치고 상오 9시30분쯤 돌아오자마자 정상천 차관과 정석모 치안국장을 비롯, 제1·제2 부국장 등 경찰간부와 김수학 지방국장을 장관실로 불러 TV를 함께 보았다.
남북한 공동성명의 발표가 있자 내무부 직원들은 모두 일손을 놓고 TV와 「라디오」가 있는 쪽으로 몰려들어 시청했는데 이 정보부장이 『평양을 다녀왔다』 는 말이 떨어지자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정보부장의 발표를 시청한 한 실향간부는 『얘기를 듣고 보니 이북을 사실상 하나의 정부로 인정하는 것이며 앞으로 휴전선을 국경화할 우려가 있다. 고향과 재산을 공산주의자에게 빼앗긴 실향민으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다』 라고 말했다.

<농림부>장관과 간부들 함께 TV시청
김보현 농림부장관은 이날 10시부터 농림부 간부들과 장관실에서 줄곧 TV를 보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의견을 나누었다. 국장들은 대부분 하곡수매 독려차 지방에 출장, 거의 자리를 비웠었다.

<국방부>낙관은 이르다-전군서 라디오 들어
국방부 청사에서는 대부분의 장병들이 이후락 정보부장의 평양 방문을 한참동안 믿으려하지 않을 정도. 장병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 남북간에 맺어진 이 합의점들이 『미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고 입을 모으면서『그러나 아직 낙관하기는 이르지 않느냐』는 조심스런 말들을 주고받았다.
국방부 당국은 이날 상오 국방부의 각 부서와 육해공군 및 해병대에 중앙정보부장의 중대발표를 녹음청취 하도록 지시한 바에 따라 각 군은 전후방 각 부대 장병들이 중대발표를 들을 수 있도록 예하부대에 지시하는 등 부산한 움직임을 보였다.

<보사부>서로 쳐다보며 어리둥절한 듯
○…이 정보부장이 평양에 다녀왔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한동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모두 일손을 멈춘 채 발표에만 신경을 쏟던 직원들은 8·15후 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거짓 평화제의를 해왔는지를 잘 알고있기 때문에 정말 앞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하는 직원도 있었으나 대부분 뭔가 모르게 기쁜 표정들이었다.

<이북5도청>박수치며 환성 목소리도 떨려
○…서울 서대문구 정동2 이북5도청 청사는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한 가운데 긴장된 표정들이었다.
이날 상오 9시50분쯤 5도위원회 위원장 이하영 평북도지사 방에는 「라디오」를 가운데 놓고 김선량황해도지사, 박재창 평남도지사, 이신득 함남도지사, 강즉모 함북도지사 등 이북 5도지사 전원이 긴장된 얼굴로 한자리에 모였다. 공동성명이 낭독되는 동안 5도지사들은 한마디의 말도 없이 합의사항을 열심히 「메모」하며 때로는 놀라움과 기쁨을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나누기도 했다.
이에 앞서 이 평북도지사 등 5도지사들은 몰려간 기자들에게 『중대발표의 내용이 무엇이냐』, 『 「라디오」를 들어봐야 알겠다』 는 등 기자들에게 묻기도 했다.
공동성명이 끝나자 이하영·이신득 두 지사는 박수를 치며 기쁨에 넘쳐있었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각 도지사들은 하나같이 감격에 목소리가 떨렸다.

<경제인단체>전화 안 받고 대책 논의도
이날 전국경제인 연합회의 경우 김립삼 부회장 등 간부들은 TV를 회의실로 옮겨놓고 즉각 긴급회의를 소집, 중대 성명발표에 따른 대책을 논의하느라고 외부전화를 일체 받지 않기도 했다.
특히 남북 동시성명 관계가 터져나오자 회의장은 긴장과 경악의 표정이었는가 하면 대한상공회의소도 전직원이 일손을 놓고 TV앞에 모여 그동안의 교섭과정, 앞으로의 전망 등으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무역협회·전경련·대한상의는 그들대로 즉각적인 공식 「코멘트」를 했다.

<시내>TV있는 다방 손님들로 꽉차
○…중대발표를 듣기 위해 다방에 몰린 시민들의 한때 긴장한 표정은「텔리비젼」을 보며 차차 밝은 표정과 감탄으로 변했다.
서울 중구 저동·명동·충무로 등지의 다방에서는 발표가 있기 20분전부터 인근 직장 등에서 손님이 몰려들었고, 발표가 시작되자 의자를 「텔리비젼」 쪽으로 돌려놓은 손님들로 꽉 메워졌다.
손님들은 『예상외의 발표』라며 한결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동 H다방에 온 김대수씨 (29· 쌍룡 「시멘트」구매과 근무) 는 어젯밤부터 중대발표가 있다는 방송을 듣고 궁금해하면서도 간첩검거 발표 같은 상례적인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 뜻밖의 남북협상에 관한 발표를 듣게 되자『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라고 말했다.
○…또 서울 동대문시장 상인들은 중대발표가 있은 상오 10시부터 장사손을 놓고 관리사무실에서 중계하는「앰프」의 「스피커」 에 귀를 기울였다.
남북한 대표가 평양과 서울을 서로 방문하고 평화적인 통일의 길을 찾겠다는 발표가 있자 한꺼번에『와』 하는 함성을 올렸다. 광장직물부 구관 특일상회 주인 김영우씨 (47) 는 1·4후퇴 때 월남, 고향인 개성에 노모 손성칠씨 (80)와 부인 송명희씨 (43) 아들 김호진군 (24) 등 가족을 만나 볼 그날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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